현재 정보기술(IT) 산업은 혼란 그 자체다. 지난 몇 년간 IT 산업을 이끌어온 스마트폰 시장이 최근 들어 위축된 탓이다. 아직 우리 주력 수출 산업인 반도체·디스플레이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실정이다.
올 상반기 반도체 시장은 스마트폰 수요 둔화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했다. 메모리 치킨 게임이 끝난 이후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이 시장 선점 효과를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기업용 PC 교체 주기가 맞물리면서 D램·낸드 플래시 등 메모리 수요가 견조한 것도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경쟁 기업들의 추격이 가속화되면서 파티는 끝났다.
우리 디스플레이 산업은 중국·대만의 추격 탓에 위태위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디스플레이 업종 내 ‘계절 효과’는 이미 실종됐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공들였던 차세대 시장은 의외로 열리지 않아 예측불허 상황도 잇따른다. 소비자 사용 습관 변화와 기술 발전 추이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급변하면서 세계 디스플레이 업체들의 주 수익원도 매 분기 바뀌고 있다.
스마트폰에 이어 반도체·디스플레이마저 무너진다면 우리 제조업은 유례없는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위기를 극볼할 방법은 하나다. 창조와 혁신으로 또 한 번의 퀀텀 점프를 해야 한다.
세계 제조업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우리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이 혼돈의 시대를 거쳐 다시 한번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시장 트렌드 변화를 잘 파악하고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기민함이 요구된다. 소재·부품·장비 등 후방 산업과 긴밀한 협력도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 반도체 기술 경쟁, 2차원에서 3차원으로
10나노미터(㎚) 시대가 열리면서 좁은 실리콘 웨이퍼 위에서 펼쳐졌던 미세공정 기술 경쟁은 다소 시들해졌다. 그러나 반도체 기술 경쟁은 끝난 게 아니다. 이제 차세대 반도체 기술 경쟁은 3차원(3D) 설계·공정으로 옮겨갔다.
삼성전자·인텔·SK하이닉스·TSMC 등 주요 반도체업체들은 차세대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3D 요소 기술 확보 및 상업화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3D 전환이 가장 빠른 곳은 낸드 플래시다. 삼성전자는 최근 메모리 셀을 수직으로 적층한 브이(V) 낸드를 양산해 자사 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SSD)에 처음 적용했다. V낸드는 종전 낸드 플래시보다 수명이 10배 길고, 읽기·쓰기 속도는 2배 이상 빠르다. 전력 효율도 40% 이상 높아 꿈의 낸드 기술로 불린다. 내년 초 중국 시안 팹이 본격 가동되면 V낸드 생산 비중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도시바 등 경쟁사도 3D 낸드 플래시 상용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연내 3D 낸드 플래시 샘플 제품을 생산해 고객사에 제공할 계획이다. 도시바도 당초 2015년 3D 낸드 플래시 출시 계획을 수정해 조기 상용화할 예정이다.
시스템 반도체에는 10나노대 공정이 적용되면서 3D 핀펫(FinFET) 기술이 본격화되고 있다. 핀펫은 기존 2차원 구조인 반도체를 3차원 입체 구조로 설계해 누설 전류를 줄인 기술이다. 트랜지스터 구조가 물고기 지느러미와 비슷해 핀펫이라고 불린다.
10나노대 핀펫 기술을 놓고 세계 반도체 3강인 삼성전자·인텔·TSMC가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와 인텔은 14나노 핀펫 기술을 확보해 양산 준비에 나섰고 TSMC는 16나노 핀펫 기술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글로벌 시장 선도 업체들의 핀펫 기술 경쟁은 시스템 반도체 시장 구도 변화에 적지 않은 파장을 가져올 전망이다.
D램에는 실리콘관통전극(TSV) 기술이 적용되면서 패키징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삼성전자는 14나노 핀펫 기술을 AP에 적용하는 동시에 TSV 패키징을 상용화해 시스템LSI와 메모리 사업 간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TSV는 D램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와 낸드 플래시를 모두 연결하는 기술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3D 기술은 시스템 반도체를 넘어 메모리 반도체·센서까지 전 방위로 확산되는 추세”라며 “우리 기업이 2차원 반도체 미세공정에서 앞선 기술을 자랑한 것처럼 3차원 반도체 시대에도 주도권을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기의 디스플레이 산업…해답은 차세대 기술 상용화
LCD는 생산 공정이 대부분 표준화되면서 후발 주자들도 투자 여력만 있으면 뛰어들 수 있게 됐다. LCD 시장 외형적으로도 더 이상의 발전은 큰 의미가 없을 정도다. TV 크기는 110인치까지 커졌으며, 두께는 소형이 1㎜대까지 얇아졌다. 경박단소·대면적화의 한계에 부딪힌 셈이다.
그러나 차세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는 여전히 우리 기업과 중국·대만 기업 간 기술 격차가 존재한다. 국내 디스플레이 업체들은 중국 등 후발 업체들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옥사이드(산화물) 박막트랜지스터(TFT) 상용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선 내년 하반기 태블릿PC에 산화물 TFT 디스플레이가 본격 채택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상반기 R&D 라인을 재정비한 삼성디스플레이는 태블릿PC에 초점을 두고 옥사이드 TFT 기술을 개발 중이다. LG디스플레이는 대면적 능동형(AM)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에 이어 태블릿PC에도 옥사이드를 적용하기 위한 라인 전환을 검토하고 있다. 일본 JDI·소니·파나소닉이 설립하기로 한 JOLED 역시 태블릿PC용 AM OLED 패널부터 양산할 예정이다. 비정질실리콘(a-Si)이 대세였던 태블릿PC용 디스플레이 시장에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삼성·LG는 색재현성·명암비 등 디스플레이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소재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LCD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에 비해 색재현성과 명암비 측면에서 뒤떨어진다. 색재현성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퀀텀닷(QD) 필름이 등장했다. 쓰리엠·나노시스가 양산에 들어가면서 QD 필름의 성능은 입증이 됐으며, 환경 문제가 대두되면서 카드뮴 없는 QD 필름까지도 조만간 시장에 나올 예정이다. LCD 구조를 그대로 두면서 색재현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이다.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새로운 고성능 소재를 발굴해야 디스플레이 성능을 향상시키고, 고부가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며 “우리 디스플레이 산업의 미래는 소재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형수기자 goldlion2@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