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반도체 분야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주목받는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맥을 못 추고 있다. 보쉬·덴소 등 기존 부품업체는 물론이고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맥심인터그레이티드 등 글로벌 반도체 설계 전문(팹리스) 업체들이 앞다퉈 사업을 강화하고 있지만 한국 기업은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고부가 영역인 차체용 반도체 사업은 사실상 전무하고 그나마 실적을 올리던 인포테인먼트 시장에선 중국산 중저가 제품에 밀리는 형국이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부품 기업이 차량용 반도체 사업을 본격화하면서 현대·기아차 같은 완성차 업체를 보유한 국내 시장도 들썩이고 있다.
차량용 부품업체뿐 아니라 그간 스마트폰 부품에 초점을 맞췄던 팹리스들도 반도체 수요가 늘어나는 차량용 시장에 눈독을 들이는 모양새다. 모바일용 반도체는 이미 경쟁 구도가 정해진데다 시장 성장도 둔화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차량용 반도체는 △파워 트레인 제어 △전장(전자장치) △인포테인먼트 크게 세 가지용으로 나뉜다. 파워 트레인 제어용 반도체는 엔진 컨트롤러 유닛(ECU)이 대표적으로 독자 기술력을 앞세운 보쉬·덴소 등이 독점하고 있다. 전장용은 마이크로 컨트롤러 유닛(MCU)이나 센서 등 차량의 보디·섀시에 들어가는 반도체다. 인포테인먼트용은 차량에 탑재되는 멀티미디어 기기에 쓰인다.
그간 한국 팹리스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파워 트레인 제어와 전장용 시장 진출은 엄두를 못 내고 주로 인포테인먼트 분야에서 경쟁했다. 텔레칩스·코아로직·넥스트칩 등이 오디오비디오내비게이션(AVN)을 포함한 디지털멀티미디어프로세서(DMP), 블랙박스 칩, 차량용 영상처리 칩 등을 공급했다.
하지만 매출이 내수에 쏠려 있고 보급형 시장에 머물러 한계가 있었다. 최근에는 중국 업체들이 저가형 제품으로 공세를 취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인텔·TI 등 글로벌 반도체업체가 사물인터넷(IoT)과 접목한 인포테인먼트용 반도체 사업을 추진하면서 국내 업체의 위기감이 더욱 커졌다. 우리나라의 차량용 반도체 수입 의존도는 90%를 크게 웃도는 것으로 추산된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팹리스는 내수 비중이 큰데다 기술력이 부족해 고부가 시장에 뛰어들기 힘들다”며 “자칫 지난 모바일 시장에서처럼 도태될 확률이 높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기업처럼 인포테인먼트용 반도체 사업의 고부가가치화를 꾀하는 한편 그간 진출하지 못했던 분야로 영역을 넓히는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문했다.
파워 트레인 제어·전장용은 차량 안전성과 직결돼 몇몇 업체가 시장을 독점할 정도로 진입 장벽이 높다. 그러나 한 번 진입하면 중장기적인 공급이 가능한데다 향후 하이브리드(HV)·전기차 시대를 맞아 성장 가능성도 크다.
국내 팹리스 중에서는 아이에이가 현대·기아차와 협력해 제품을 개발, 공급하고 있으나 아직 매출이 많지 않다. 아이에이 관계자는 “일부 차량에만 쓰이고 있다”며 “작년 하반기부터 매출액이 올라 내년쯤이면 본격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다. 최근 LG그룹에 편입된 실리콘웍스도 차량용 각도·변위 센서를 개발, 양산했지만 사정은 비슷하다.
이혁재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시스템반도체PD는 “스마트카·전기차 등은 새롭게 형성되는 시장인 만큼 한국 업체도 이를 겨냥해 준비해야 한다”며 “완성차 연구개발(R&D) 프로젝트와 연계해 실제 수요를 발굴하는 등의 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주연기자 pilla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