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주 제작사가 표준계약서 이행을 강하게 요구하는 배경에는 복잡한 방송계 현실이 얽혀 있다. 드라마 한 편을 제작할 때 외주제작사가 기획안을 내놓으면 방송사는 이를 검토해 방영권을 가지는 조건으로 제작비의 50%를 지급한다. 제작사는 이를 토대로 자기자본과 함께 마케팅을 펼쳐 협찬과 해외 판매, 투자를 통해 나머지 제작비를 충당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제작사가 작품을 만들어 공급하면 수익배분과 저작권에서 멀어진다는 현실이다. 한 드라마제작사 대표는 “방송사와 마찬가지로 제작사는 50% 이상 제작비 조달은 물론이고 작품 제작을 전담하지만 저작권은 일방적으로 방송사나 그 자회사에 귀속되고 부가판권 판매도 적극적이지 않아 수익을 분배받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제작비도 비현실적이라고 성토했다. 다른 제작사 대표는 “방송사가 지급하는 제작비는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스타의 몸값과 작가 고료를 정산하기에도 부족하다”며 “그러면서도 방송사는 스타 배우나 작가 없이는 편성마저 거부하고 제작비에 자체 시설 이용 대가나 방송사 직원 비용까지 계산해 책정한다”고 말했다. 비현실적인 제작비가 제작사의 경영구조를 악화시키는 셈이다.
제작비 현실화를 위해 표준계약서에 적힌 제작비 명시와 저작권 분배를 요구하지만 방송사는 요지부동이다. 방송프로그램 표준 계약서 이행이 1년째 제자리를 맴돌면서 정부가 새로운 방송정책을 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권호영 한국콘텐츠진흥원 수석연구원은 “영국은 외주전문 ‘채널4’ 도입과 2003년 커뮤니케이션법 제정으로 제작비 기준 쿼터와 저작권 처리 규정을 담아 오히려 방송사와 제작사가 윈윈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분석했다.
영국은 지난 20013년 저작권을 제작사에 귀속시키는 내용으로 방송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영국방송법은 판권 대부분을 외주제작사가 가진다. 외주제작 비율도 25%로 늘렸다. 방송사들의 거센 반발에도 통과된 법은 이후 영국 방송콘텐츠 시장의 질적 성장을 이끌었다. 2000년 이전 평균 5% 성장에 그쳤던 외주시장은 2003년 이후 2008년까지 연평균 30%대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창수 판미디어 대표는 “영국도 2000년대 초반까지 열악한 자본과 인력으로 인해 시장이 오히려 위축되는 상황을 겪었지만 2003년 방송법이 통과된 이후 제작사들이 성장하면서 창조적 방송콘텐츠 포맷을 만들어내면서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강제적 표준계약서 이행이 안 된다면 정부의 지원을 연계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지난 4월 미래창조과학부가 글로벌 다큐멘터리 15편 등 제작을 지원할 방송프로그램 120편을 선정해 방송사업자가 독립제작사 등에 50~90% 저작권을 배분하도록 의무화했다. 이를 전 방송프로그램 영역으로 확대하자는 것이다.
외주제작사 기준도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박상주 드라마제작사협회 사무국장은 “현행 외주제작사제도는 방송사 하도급 기준에 불과하다”며 “기준요건을 강화해 제작사가 저작권을 가지는 구조를 만들면 제작사 간 경쟁체제가 본격화돼 질 좋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제작사 권리도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경민기자 km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