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금융지주 회장과 국민은행장 갈등으로 2000억원 규모의 전산시스템 도입 프로젝트가 중단될 위기에 직면했다. 은행 전산시스템인 메인프레임을 유닉스로 전환하는 이른바 ‘스마트사이징사업’에 대한 시스템 도입 가격에 대한 논란이 은행 내부 갈등으로 비화되면서 은행 자체 감사와 금융감독원 특별감사에 이어 사업 추진근거가 된 이사회 결정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신청까지 검토되고 있다.
이에 따라 올해 은행권 최대 전산시스템 도입 프로젝트가 당분간 좌초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1년 이상 이를 준비해온 정보기술(IT) 서비스 업계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커졌다. 나아가 금융감독원이 이번 사건으로 국민은행의 기강 해이가 심각하다는 판단에 따라 사상 처음으로 국민은행 전체를 대상으로 강도높은 경영진단에 나설 방침이어서 문제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20일 은행권과 IT업계에 따르면, 정병기 국민은행 상임감사위원이 전산시스템인 IBM의 메인프레임을 오픈시스템인 유닉스로 전환하는 스마트사이징 사업 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감사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사태가 확대됐다. 지난 4월 이건호 국민은행장은 한국IBM 대표로부터 유닉스 다운사이징이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을 야기시킨다며 사업 추진 의사결정 절차에 문제가 있다는 메일을 받고 정병기 상임감사위원에게 감사를 지시했다.
국민은행은 이후 내부감사를 진행, 스마트사이징 사업을 의결한 의사회의 판단기준으로 활용된 보고서가 유닉스 서버의 가격과 잠재위험 요인을 축소했다고 지적했다. 정 상임감사위원은 19일 긴급으로 열린 이사회에서 감사보고서를 제출했으나 사외이사 6명이 수용을 거부하자, 금감원에 보고했다. 금감원은 당일 즉각 국민은행 특별 감사에 착수했다.
최고정보책임자(CIO)인 김재열 전무는 “정 상임감사위원은 은행경영협의회와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항에 대해 자의적 감사권을 남용했다”고 반박했다.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은 스마트사이징 사업 논란에 대해 “국민은행 이사회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해 은행장, 상임감사위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입장을 밝혔다. 내부 갈등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내부 갈등으로 은행의 차세대 전산시스템 도입 프로젝트가 지연됨은 물론 이를 준비해온 업체들의 비용손실 등 피해가 커지게 됐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국민은행 관계자는 “사업자 일정 변경에 대해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제안서 접수는 예정대로 21일 마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검토됐던 국민은행 메인프레임 다운사이징이 또 다시 표류될 위기에 처했다. 대외적으로 유닉스 서버 가격 경쟁력 논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임 회장과 이 행장간의 갈등으로 불거진 내홍이라는 것이 금융권의 전반적인 시각이다.
당초 임 회장은 이 행장의 독선을 막기 위해 정 상임감사위원을 선임하는 데 지원했다. 그러나 이번 갈등에는 오히려 이 행장, 정 상임감사위원이 임 회장과 대립 각을 세웠다. 수면 아래 있던 회장과 행장의 갈등이 스마트사이징 사업의 의사회 결정으로 수면 위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금감원이 사상 초유의 대대적인 감사까지 진행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표면적인 논란 배경인 기존 메인프레임 서버를 유닉스 서버로 전환하는 것이 가격 메리트가 있는 것인지, 위험 요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는 의외로 명확하다. 과거 은행권의 기간계시스템은 대용량과 실시간 금융거래 처리를 위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인식돼온 메인프레임이 사용됐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이후 유닉스 서버 성능이 큰 폭으로 개선되면서 외환·신한·하나·기업·농협은행 등 대형 은행들이 앞 다퉈 유닉스시스템으로의 다운사이징을 진행했다. 현재 국민은행과 우리은행만이 메인프레임을 사용하고 있다. 메인프레임 사용에 따른 높은 IT아웃소싱 비용 부담도 다운사이징을 검토하게 만든 배경이다. 한국IBM은 국민은행과 1500억원 규모의 메인프레임 사용 아웃소싱 계약을 맺고 있다.
국민은행은 지난해 메인프레임을 유닉스로 전환하는 스마트사이징을 본격 추진해 IBM·HP·오라클 유닉스 서버 제품 대상으로 벤치마킹테스(BMT)를 진행했다. 지난달에는 시스템통합(SI), 서버 등 하드웨어(HW)와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 등 소프트웨어(SW)를 묶어 통합 발주하기에 이르렀다.
LG CNS, SK C&C 등 IT서비스기업과 HW·SW업체가 컨소시엄을 구성, 21일 제안할 계획이지만 사업자 선정 절차가 진행되기는 사실상 어렵게 됐다. 은행이 사상 초유의 감사와 경영진단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가 된 프로젝트를 정상적으로 진행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안 준비했던 IT업체는 당황스러운 분위기다. IT업체 관계자는 “한두 달 진행된 사업도 아니고 1년 넘게 제안 준비한 사업인데 제안서 마감 앞두고 갑작스럽게 사업을 취소해야 한다는 내부 주장이 나와 당황스럽다”며 “IT업체는 BMT 등으로 많은 비용을 이미 투자한 상황이어서 사업이 취소되면 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그동안 정보자원 효율화를 주창해온 국민은행의 10년 노력도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김 전무는 “유닉스시스템으로의 전환은 메인프레임 사용에 의한 IBM의 독점 체계를 개선하고 정보자원 운영 효율화를 위한 것인데 쉽지 않은 국면이 펼쳐졌다”고 말해 당혹스런 상황이 불가피할 것임을 시사했다.
신혜권기자 hkshin@etnews.com,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