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거대시장 진출 `노림수`가 첨단기술 유출 `자충수`될 수도

삼성전자 시안 팹이 본격 가동되면서 이재용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

중국 법인 수는 벌써 30여개에 달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에게 시안 반도체 팹은 의미가 남다르다. 이재용 부회장은 중국 시장을 공략한다는 명목 아래 삼성전자가 반도체 불모지인 시안에 최첨단 팹을 깔도록 밀어붙였다. 중국에 첨단 기술이 유출될 수 있는 위험 부담까지 안았다. 삼성그룹 후계자로 부상한 이후 그가 이토록 큰 위험을 감수한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중국이라는 변수가 중요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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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 팹은 ‘이재용의, 이재용에 의한, 이재용을 위한 프로젝트’로 불린다. 성공하면 이재용 체제를 연착륙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자칫 실패할 경우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흔드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

시안 팹은 미국 오스틴 팹에 이은 삼성전자의 두 번째 반도체 해외 생산기지다. 삼성전자가 중국에 투자한 프로젝트 중 사상 최대 규모다. 삼성전자는 총 70억달러를 투자해 시안에서 최첨단 브이낸드(3D 낸드 플래시)를 생산한다.

지난 2011년 삼성전자가 중국에 10나노급 낸드 플래시 생산라인을 건설하겠다고 선언하자 국내 반도체 업계는 발칵 뒤집혔다. 저렴한 인건비 때문에 완제품 공장을 짓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이 보유한 세계 최고 반도체 기술을 해외, 그것도 중국에 노출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증폭됐다.

장소도 의아했다. 당초 시안은 모래 바람 하나만으로도 반도체 생산 거점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막상 삼성전자가 시안을 반도체 거점으로 낙점하자 부정적 의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안이 반도체 거점으로 타당한 근거들이 산업계뿐 아니라 언론·학계에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이라는 범을 키우는데 삼성전자가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될 것이란 우려는 주목받지 못했다. 시안 팹 설립이란 위험한 승부수를 던진 이재용 부회장이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을까.

◇반도체 기술에 목마른 시진핑…“이재용의 위태로운 승부수”

중국은 고속 성장기를 거쳐 산업 고도화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 세계 최대 제조업 허브지만, 산업 고도화를 이룰 기술과 노하우가 부족하다. 중국은 첨단 기술을 도입하는데 대만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명분도 있고, 장기적으로 범 중화권 발전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모리 등 일부 분야에서는 대만이 한국에 상당히 뒤처져 있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기술 확보를 위해 삼성전자에 러브콜을 보낸 이유다. 삼성전자는 최첨단 브이(V)낸드 팹을 시안에 설립하는 방식으로 화답했다. V낸드는 3차원 적층 방식 낸드 플래시로 현재 세계에서 삼성전자만 양산 가능한 기술이다. 삼성전자는 시안 팹 설립을 계기로 시진핑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중국 내수 시장을 공략해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복안이다.

문제는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전자가 과연 시진핑 정권을 상대로 얼마만큼의 실리를 얻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시진핑 정부는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을 육성해 산업 고도화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스마트폰·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중국이 우리나라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것처럼 반도체도 언제 추격당할지 알 수 없다.

반도체 업계 한 원로는 “우리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중국과 경쟁하려면 기술 격차를 유지해야 한다”며 “이재용 부회장이 세계 최고 상술의 중국을 상대로 얼마나 실리를 챙길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시안 팹 투자…“범(중국)에게 날개 달아 준 격”

반도체 산업은 볼륨의 미학으로 꼽힌다. 중국이 막대한 자본력을 보유한 만큼 기술과 노하우만 확보한다면 언제든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을 견제할 수 있다. 중국은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반도체 수요 국가지만, 중국 기업을 통한 공급은 전체 수요의 10%에 불과하다. 10~20년 내에 중국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의 반도체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목표다. 현재 중국 반도체 업체들은 상당한 세제 혜택을 누리고 있다.

지난해 중국의 연구개발(R&D) 투자 총액은 1조240억위안(180조원)을 넘어섰다. R&D 인력은 300만명을 웃돈다. 지난 2010년 중국의 R&D 투자금액은 이미 한국의 3배를 넘어섰다. 삼성전자가 중국에 반도체 인프라를 깔아주면서 ‘범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중국 기업들은 자본이 풍부하고 공격적으로 투자하기로 유명하다. 반도체 등 첨단 산업 육성을 위해 중국은 세계 최우수 대학을 졸업한 공학도를 대규모로 끌어들이고 있다. 반도체 관련 인력 풀이 그 만큼 좋아졌다.

미국에서 정보기술(IT)을 공부한 중국 엘리트들은 현지 취업을 고집하지 않는다. 인텔·IBM 등 미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에 취직하는 중국인도 많지만, 좀 더 비전 있고 야망이 있는 중국인은 본국으로 돌아가 창업을 한다.

중국 반도체 설계회사 사장은 “미국에서 취업하면 아시아인은 잘 돼도 중간 관리자에 불과하지만, 중국에서 창업하면 대기업 사장도 얼마든지 될 수 있다”며 “과거 한국의 국비 유학생들이 낙후된 조국의 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귀국한 것처럼 중국에도 애국심 충만한 젊은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기술 유출 없다”…과연 그럴까?

삼성전자는 시안 팹에서 최첨단 V낸드를 생산해도 기술 유출 문제는 없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반도체 전문가들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중국은 세계 최대 제조업 허브다. 사회 기반 시설이 잘 구축됐고, 노동자 숙련도도 높다. 중간 관리층도 잘 양성돼 있다. 첨단 기술을 단기간에 습득하는데 최적의 구조인 셈이다.

유럽·일본 등 선진국 기업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중국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다. 고가 제품은 본국에서 만들고, 부가가치가 낮고 저렴한 제품은 중국에서 생산하는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다. 독일 기업은 중국 생산라인에서 나온 수익을 본국에 재투자해 산업 고도화를 이끄는 전략을 구사한다. 기술 유출과 중국의 급부상을 우려한 조치다. 현지화와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첨단 기술을 가리지 않고 중국에 내보내는 우리 기업과 대조적이다.

반도체 업계 한 전문가는 “중국에서 고부가 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양날의 칼’”이라며 “중국 내수 시장을 공략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자칫 기술과 노하우를 통째로 흡수당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 현재 상당수의 한국인 기술자들이 중국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디스플레이 산업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중국 기업에서 일하는 것은 높은 급여 때문이다. 중국 기업은 자국민에게는 얇은 봉투를 주지만, 기술을 보유한 한국인에게는 엄청난 대우를 한다. 일찍이 경제 발전을 경험했고, 중국이 가야할 길을 한국이 이미 거쳐왔기에 그 기술과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반도체 산업도 이 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기획취재팀 jeb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