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프린터 부품 업계가 고사 위기에 빠졌다. 세계 1위 재활용 감광드럼(OPC드럼)을 생산하는 업체들이 부도 직전까지 몰렸다. 이유인즉 일본 캐논이 특허권을 무기로 10여 년간 국내 업체 6군데에 줄이어 장기간 소송전을 펼치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들 업체에 현재 200억 원이 넘는 손해 배상이 청구된 상황이다.
캐논은 감광드럼과 프린트 카트리지를 연결하는 일종의 나사(기어) 부분이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는 주장이다. 아직도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남아 있는 상태지만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국내 제품의 이미지는 크게 추락했고, 고객 이탈도 가속화되고 있다. 주요 업체들이 줄이어 지난해 수십억 원의 영업 적자를 떠안았다. 프린터 산업 생태계가 흔들릴 정도다.
기막힌 것은 이런 소송이 우리나라에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캐논은 중국과 대만의 감광드럼 업체에도 같은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중국과 대만 법원은 일본 내에서도 2개 업체가 동일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뒤, 캐논에게 자국 감광 업체에 소송을 제기하고 그 판결에 따라 심판하겠다고 주장했다.
캐논은 자국 업체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았고, 중국·대만 업체에도 소송을 걸지 못했다. 반면 소송을 받아들인 국내 법원은 힌국무역위원회가 인정한 캐논 특허무효 의견도 받아주지 않은 채 그저 캐논 손을 들어줬다.
무엇보다 국내 업체들은 자사 제품의 특허권 위법 여부를 제대로 따져보지도 못했다. 자사 제품의 특허 침해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확인심판을 청구했지만 특허심판원이 그 자체를 기각했기 때문이다. 특허 침해 여부에 대한 확인도 받아보지도 못한 것이다. 심지어 최초 판결을 주도한 법원의 모 판사는 판결 이후 캐논의 법률대리인인 김앤장으로 이직했다.
캐논이 국내 업체들을 고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소송전을 펼쳤다는 주장이 국내 업계 일각에서 나오는 것도, 뒷짐만 지고 있는 정부에 쓴소리를 던지는 것도 모두 이런 배경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비보호 좌회전’ 같은 나라입니다. 정부가 뭘 해주길 기대하면 안 됩니다. 알아서 살아남아야지.” 세월호 실종자의 한 가족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성현희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