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제네바 외곽의 메랭 지역에 위치한 유럽 입자물리학연구소(CERN). 지난달 24일(현지시각) 미래창조과학부 공동취재단이 찾은 CERN은 전체 예산과 연구 인력의 90%를 투입할 정도로 대규모 강입자가속기(LHC)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세계 최대의 입자물리연구시설이라는 명성을 가져다준 것도, `신의 입자`라고 불리는 힉스(Higgs) 입자를 찾아낸 것도 LHC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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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RN ISOLDE 설치 건물

하지만 이곳 CERN에 LHC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LHC 외에도 크고 작은 여섯 개의 가속기가 더 있었고, 힉스 입자를 찾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CERN 여러 연구 시설 중에서도 핵물리학 관련 연구시설인 이졸데(ISOLDE)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2019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국내 대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에 들어 설 중이온가속기 `라온`과 규모나 연구 목표 등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다. LHC처럼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지 않더라도 핵물리학 기초가 되는 연구에서부터 산업적 응용까지 다양한 연구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CERN의 ISOLDE는 가속기가 아니라 동위 원소를 실시간으로 검출하는 장치(Isotope On-Line Detector)다. CERN의 선형 가속기 가운데 하나인 리낙2(Linac2)로부터 양성자를 받아 이온들과 충돌시켜 동위원소를 생산하고, 이를 검출함으로써 생산된 동위원소의 특성을 파악하는 연구가 이뤄지는 곳이다.

동위원소는 핵을 구성하는 양성자와 중성자 중에서 양성자 숫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원소와 동일하지만 중성자 숫자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를 말한다. 하나의 원소에도 수십 개의 동위원소가 존재할 수 있다. 스페인 출신의 연구책임자인 마리아 보르지 박사는 “ISOLDE에서는 가속기를 활용해 동위원소의 특성 등을 연구하는 곳”이라며 “이곳의 연구 성과는 새로운 물질의 연구나 암 치료, 생명과학 등에 응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장치를 활용하는 연구 인력은 CERN 전체의 7% 정도인 450여명이다. 세계 25개국의 100여개 기관의 연구 인력이 모여 함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ISOLDE 연구팀은 CERN 전체에서 생성된 양성자의 절반을 가져다 쓰는 대신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동위원소를 만들어 내고 있다.

45년의 역사를 가진 ISOLDE 연구팀은 지금까지 70여개 원소(element)에서 700여개의 동위원소(핵종)을 새로 찾아냈다. ISOLDE 연구팀 연구 성과를 벤치마킹한다면 중이온가속기를 설치, 운영하게 될 한국의 과학자들도 이른 시간 안에 새로운 동위원소(핵종)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잘하면 새로운 원소까지 찾아낼 수도 있다.

ISOLDE팀은 원소 질량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것을 포함해 이러한 동위원소들의 다양한 특성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 이뤄진 연구 성과로는 원자번호 85번의 아스타틴(Astatine, At-85)이란 원소의 특성을 밝혀낸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아스타틴 원소에서 핵을 둘러싼 전자구름의 특성이 파악되지 않았는데, ISOLDE 연구팀이 이 원소의 특성을 밝혀냈다.

이곳에서 진행되는 연구는 천체 물리학과도 연결된다. 우주의 중성자별에는 아연 동위원소 중에서도 Zn-82가 풍부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분리하기 까다로운 아연의 동위원소를 체로 걸러내듯이 따로 분리해 개별 특성을 연구하고 있다. 핵 속의 양성자와 중성자 숫자가 달라질 때 어떤 특성을 갖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연구팀에서는 공처럼 생긴 원자핵이 아닌 서양 배(pear) 모양의 원자핵을 가진 동위원소를 찾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연구팀은 라듐(Ra-224)이나 라돈(Rn-220) 등에서 이처럼 특이한 모양의 원자핵을 찾아냈고 이 결과를 담은 논문은 최근 과학 저널인 네이처에 게재됐다.

새로운 물질의 구조와 특성 연구에서도 ISOLDE에서 생산한 방사성 동위원소를 활용할 수 있다. 연구팀은 그래핀(Graphine) 구조를 밝히거나 반도체를 개발하는 데도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핀은 탄소 원자만으로 구성된 평면구조로 두께는 원자 하나 정도다. 그래핀은 탄소 나노튜브 등을 만드는 기본 소재로 각광 받고 있다. 보르지 박사는 “그래핀 구조를 밝히는 것 등과 관련해서는 한국의 성균관대학과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ISOLDE에서는 생명과학과 관련된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일부 단백질에는 금속 이온들이 결합돼 있는데, 어떤 방식으로 결합돼 있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연구팀의 티에리 스토라 박사는 “ISOLDE에서는 앞으로 암 진단 등과 관련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될 예정이며 관련 연구시설을 CERN 내에 설치하기 위한 확장 공사도 9월 초에 시작됐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암 진단을 위해 무당개구리에서 봄베진(bomesin)이란 펩타이드(짧은 단백질)를 추출해내고, 여기에 방사성 동위원소를 부착한 뒤 이를 환자에게 주사하는 방식이다. 밤베진이 암세포를 찾아내 달라붙으면 방사성 동위원소가 내는 방사선을 PET(양전자단층촬영)로 촬영해 암세포의 위치, 크기 등을 파악하게 된다.

암 진단에 사용되는 방사성 동위원소는 단백질(펩타이드)에 잘 붙어야 하고, 반감기가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아야 한다. 스토라 박사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활용한 암치료 방법은 앞으로 스위스 제네바대학 등과 공동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라며 “의약품으로 개발하기 위한 임상단계별로 적절한 외부기관과 협력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미래창조과학부 공동취재단·


류경동기자 ninan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