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1주년 특집2-창조, 현장에서 찾다]창조경제, 현장이 답이다- 자갈밭과 바다에서 찾은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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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가을,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을 불렀다. 오일 달러가 넘쳐나는 중동국가에서 건설공사를 할 의향이 있는지 타진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너무 더워 일을 할 수 없고, 건설 공사에 필요한 물이 없어서 불가능하다는 답을 한 터였다. 미션을 받고 한달음에 중동에 다녀온 정 회장은 대통령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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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 하기에 가장 좋은 지역입니다” “왜요?” “비가 오지 않으니, 1년 열두 달 내내 공사를 할 수 있습니다” “또요?” “건설에 필요한 모래, 자갈이 현장에 있으니 자재 조달이 쉽습니다” “물은?” “그거야 어디서든 실어오면 되지요” “50도나 되는 더위는?” “낮에는 자고 밤에 시원해지면 그 때 일하면 됩니다”

1970년대를 상징하는 중동 붐은 이렇게 시작됐다. 대한민국 심장이 다시 뛰고 있다. 새로운 경제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창조경제`가 국정철학 키워드로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 창조경제를 정의하지 못했다.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는 물론 명망 있는 정계, 산업계 인물에게 창조경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추상 답변` 일색이다. 한결같은 결론. `상상력과 창의성을 과학기술과 ICT에 접목해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창출하고, 기존 산업을 강화함으로써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 정도다. 주역은 벤처와 중소기업이고 인재는 창의적인 꿈과 끼, 도전정신을 갖춘 자라고 집약한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창조경제의 실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본지 창간 31주년을 맞이해 텍스트로 정리된 `창조경제`가 아닌 실체를 파헤쳐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영국의 `창의경제(creative economy)`가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창조경제로 무늬만 탈바꿈한 것 아닌가 하는 호기심도 발동했다.

고 정주영 회장의 70년대 짤막한 일화는 창조경제를 찾는 방법을 제시했다. `현장`이다. 창조경제는 거창한 `목표`가 아닌 이미 우리 산업현장에 오래전부터 모습을 드러내온 그 어떤 것이 아닐까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무작정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창조경제, 우리 한번 만나볼까?

◇창조=창의+α

한국하면 제조업이다. 우리나라가 연 평균 4.6%의 견실한 성장세를 이어온 것은 제조업이 허리를 받쳐줬기 때문이다. 미국 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따른 경기위축 상황에서도 견뎌낸 것도 이 덕분이다. 문제는 정보통신과 제조업 중심의 성장이 고용 없는 성장과 청년실업 문제를 동반하고, 산업구조의 동맥경화를 유발했다는 점이다.

산업 구조 혁신과 변화 없이는 `고용 있는 성장`으로 전환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새 정부의 창조경제라는 한국식 발상 또한 신산업과 일자리 `창조`를 위한 시대적 요구와 고뇌에서 비롯된 산물일지 모른다.

터키 이스탄불. 이곳에 색다른 현장 작업이 한창이다. 이스탄불을 횡단하는 포스포러스 해협 지하에 해저 터널을 뚫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최초의 시도다. 한국 대표로 SK건설과 한신공영이 손잡고 프로젝트 발굴에서 건설, 운영을 맡았다.

콜롬비아 보고타. 한국의 버스전용차로제는 보고타시에서 들여왔다. 하지만 7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IT기술을 접목해 대중교통 요금자동징수와 관리시스템을 구축해 역수출하는데 성공했다.

필리민 민다나오 라귄딩간 공항. 한국기술로 만든 동남아시아 최초의 국제공항이다. 우리나라기업들이 건설부터 완공까지 끝냈고, 한국 항법기술을 구축하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국산 항법기술이 해외에 수출되기는 처음이다.

이 해외 수출 프로젝트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역발상과 협업이다. 재래산업 일색의 수출 방식에서 탈피해, 창조형 수출 구조를 만드는 것. 이것이 또 다른 수출 품목으로 이어지고, 기업간 클러스터가 형성돼 제 2의 창조 시너지로 발현된다.

창조경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오리진(origin)의 협업`이다. 오리진(origin)이란 세상에 없던 제품, 또는 그것을 만드는 사람을 지칭한다. `스스로 처음이 되는 것` 현장에서 찾은 창조경제의 중간 답이다.

◇정부와 기업의 콜라보레이션 효과

해외 수출산업은 점차 대형화·융복합화하는 추세다. 개별 기업이 단독 진출하기 보다는 정부와 은행, 기업간 컨소시엄을 구성하거나 기업과 기업 연대, 전혀 다른 분야를 결합해 역할분담을 하는 콜라보레이션, 혹은 컨버전스가 급격히 진행 중이다.

포도 넝쿨처럼 협업시스템을 가동해 더 단단해지고, 만족할만한 결과를 도출한다. 국내 기업의 해외 수출 부상지로 동남아시아벨트가 새롭게 조명된다. 진출 방법 또한 정부가 해당국에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지원하고, 사업 입찰에 한국기업이 컨소시엄을 꾸려 참여하는 방식이다. 자금이 부족하면 시중 은행이 또 하나의 지원군으로 나선다. 독자 진출보다는 협업시스템의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EDCF는 1987년 개도국의 산업발전과 경제안정을 지원하고 이들 국가와 경제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우리나라 정부가 설립한 기금이다. 기금 제공을 통해 우리나라 기업의 해외 진출과 수주 경험을 쌓는 토양이 되고 있다.

동남아시아 벨트는 우리나라 EDCF를 활용한 수출산업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다. 그동안 한국정부는 베트남에 1조9000억원, 필리핀 8000억원, 인도네시아 6000억원, 캄보디아 4200억원의 막대한 EDCF를 지원했다.

지원 과정에서 기금 운용처인 수출입은행은 각 나라에 한국 기업의 수주를 직간접적으로 제안하고, 한국기업은 별도의 컨소시엄을 꾸려 공익형 수출산업에 나선다. 이를 통해 전세계 해외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경험을 쌓는 선순환구조가 이뤄진다. 진출 사업도 전통 산업보다는 보다 창의적인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정부통신망 산업은 물론 B형 간염백신 공장, 조세정보시스템, 항법지원 등 진출이 두려운 미개척분야에 속속 한국기업들의 참여가 늘고 있다.

◇뜨거운 태양빛이 구석구석 쌓인 눈을 녹인다.

창조경제를 찾아 떠난 동남아시아 출장. 현장에서 찾은 답은 우리가 말하는 창조경제의 실체가 눈 속에 덮여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 금융사들이 함께 만든 강력한 태양빛 아래 쌓였던 눈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태양빛은 창조경제 주체들의 부대낌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는 이미 검증된 경쟁력을 더 잘 키우고 활용하라. 그 안에 창조가 있다. 한국자동차 산업이 세계 5위로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품산업의 동반 성장이었다. 협업의 지도를 새롭게 구축해 정부와 기업간 교집합을 만드는 일, 유기적인 협업만이 눈속에 숨어있는 창조경제를 끄집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길재식기자 osolgil@etnews.com

[표] 동남아시아 국제협력기금 지원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