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예비 과학도에게
20여년 전 칠레 남단 푼타아레나스 공항에서 초등학생들에게 둘러싸인 적이 있습니다. 그 눈에 동양 여인이 신기해 보였나 봅니다. 졸지에 동물원 원숭이가 된 나는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습니다.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이들은 교사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되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몇몇 아이가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와 볼에 뽀뽀를 하고 갔습니다. 시골 기차역 같던 푼타아레나스 공항도 이제 멋지게 지어졌고, 더이상 나에게 웃으며 뽀뽀를 해주는 아이들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훨씬 여유롭고 기품 있게 느껴지는 이들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극을 오가면서 칠레 남단 파타고니아평원을 자유여행하는 커다란 배낭을 멘 젊은이를 많이 보았습니다. 세계에서 온 이들 중에는 가냘프게 보이는 어린 여학생도 있었습니다. 걸치고 있는 옷이 바뀌긴 했어도 표정과 미지의 세계를 보는 진지함은 20년 전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대학생들도 배낭여행을 많이 가는데 맞춤식으로 잘 짜여서,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그러나 모험이 배제된 배낭여행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에게 스펙 쌓기가 유행입니다. 어느 분이 기계에 적용하는 스펙을 사람에게 적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이 거대한 취업 준비의 장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조금의 시간 낭비도 없이 노력에 있어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며 최고 경쟁력 있는 스펙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많은 사람이 지금도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개인 스펙 쌓기에 열중하는 우리 젊은이가 얼마나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고 진정 세계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인터넷으로 이제는 세계 구석구석 모든 정보를 손안에 넣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정보 접근성에 있어서는 세계화가 구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외국어를 잘한다거나 외국을 많이 다녀보았다고 세계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생각의 폭 넓히기, 다른 사고나 의견, 더 나아가 타 문화를 대하는 포용력이 진정한 세계화의 밑거름이 아닐까 합니다. 폭넓은 경험, 사고 유연성은 좋은 과학자가 되기 위한 필수 덕목이기도 합니다. 창의적 사고를 하기 위해 우선 진부한 사고의 틀을 깨야 합니다. 남극이라는 극한의 자연뿐 아니라 오가며 만난 많은 사람,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을 접하면서 나는 경직된 사고가 조금씩 유연해져 간 것 같습니다. 연구에도 영향을 준 것은 물론이고요.
18년 전 남극 최대의 과학기지인 미국 맥머도기지에서 한 달간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기숙사 룸메이트가 네덜란드 출신 생명공학자인데, 늘 실험실에만 갇혀 일했던 그녀는 처음 접하는 남극의 자연에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이 경이로운 체험은 그녀가 지금까지 해왔던 연구에 큰 영향을 준 것 같았습니다. 적어도 자신이 실험실에서 다루던 한 조각의 세포와 유전자가 어떤 생명체의 것이며, 이 생명체가 자연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하면서 많은 영감을 얻고 고정된 사고의 틀을 깨고 이론적 틀을 넓힐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이듬해 한 번 더 남극을 찾았습니다. 스위스 제약회사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던 그녀는 후에 본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가 교수가 되었습니다.
아날로그 세대에서 디지털 세대로의 전환기를 거쳐 온 나는 아날로그적 체험에 지나친 향수를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스펙 쌓기에 열중인 우리 젊은이에게 때론 우물 속에서 벗어나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고 가 본적 없는 길을 헤매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위대한 발견과 깨달음이 때론 계획된 프로젝트가 아니라 우연에 의해 이뤄지지 않았던가요.
From. 안인영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
제공:WISET 한국과학기술인지원센터 여성과학기술인 생애주기별 지원 전문기관(www.wise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