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스프린트를 삼키다
가입자 약 1억명에 육박하는 글로벌 통신그룹이 탄생했다. 일본 소프트뱅크가 미국 스프린트넥스텔을 인수했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의 승인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미국 정부와 보안 협약도 끝냈기 때문에 승인은 어렵지 않을 전망이다.
이로써 소프트뱅크는 무선매출 554억달러(약 61조원)로 AT&T, NTT도코모, 버라이즌, 차이나모바일 등 글로벌 주요 무선사업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소프트뱅크는 지난해 10월 15일 발표된 이번 인수 건을 놓고 미국 위성방송시장 2위 사업자 디시네트워크와 막판까지 경합을 벌였다. 소프트뱅크가 스프린트 지분 78%를 216억달러(약 24조8700억원)에 사는 안에 주주의 약 80%가 찬성했다. 이 중 166억달러는 스프린트 주주에게 지급한다.
◇내수기업 한계 벗어나 글로벌 시장서 새 성장동력 발굴= 아이폰으로 일본 통신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소프트뱅크는 지난 몇 년간 사상 최고의 실적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손정의 회장은 지난해 8월 “이대로라면 몇 년 뒤 NTT도코모도 앞지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전체 시장규모가 정체된 일본 시장에서 지속적인 성장세를 구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또 일시적으로 뒤처졌던 NTT도코모가 종합적인 서비스 혁신으로 견제해 오자, 손 회장은 일본에서 해외로 눈을 돌렸다.
미국은 3억5000만명의 이동통신 가입자와 1억7000만명의 스마트폰 이용자를 보유한 거대 시장이다. 특히 스프린트 가입자의 약 25%는 선불가입자로 이들이 후불로 전환했을 때 거대한 잠재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성숙한 시장과 명확한 제도, 정부 개입이 비교적 적은 미국은 소프트뱅크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거두기에 적합했다.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와 FCC 역시 정체 상태에 있는 미국 통신 시장의 경쟁 활성화를 위해 외국계 자본 도입에 긍정적인 상황이다.
보다폰재팬을 인수하며 일본에서 성공을 맛본 손 회장은 일본과 유사한 환경을 지닌 미국 통신 시장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 직접 진출을 결정했다. 스프린트 경영실적을 개선해 소프트뱅크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글로벌 LTE-TDD 시장 승자를 향한 `한 걸음`= 이통사가 폭증하는 데이터 트래픽, 줄어드는 음성 수익 등 당면한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려면 LTE로의 진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특히 전송 속도를 올리는데 한계가 있는 WCDMA 방식을 지원해 왔던 소프트뱅크로서는 새로 열린 LTE 시장을 선점해 시장 1위에 오르고 싶은 의지가 강하다.
소프트뱅크는 스프린트 인수에 만족하지 않고 미국 4위 사업자 T-모바일과 5위 메트로PCS, 스프린트 자회사 클리어와이어까지 연쇄적으로 인수할 공산이 크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미국 시장 1, 2위인 버라이즌과 AT&T를 따라잡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글로벌 LTE-TDD 생태계의 주류로 편승할 발판을 마련하는 셈이다.
관건은 클리어와이어 인수다. 2.5㎓ 대역에서 무선 광대역 서비스를 하는 클리어와이어는 LTE-TDD 시장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다. LTE 네트워크에 투입할 주파수 대역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클리어와이어를 인수하면 소프트뱅크 단말기와 스프린트 네트워크 간의 자유로운 글로벌 로밍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현재 인수전 경쟁자였던 디시네트워크가 클리어와이어라도 인수하겠다며 주식 공개매입을 선언해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동안 소프트뱅크는 일본 시장에서 만반의 대비를 해왔다. 4G 통신용 900㎒ 주파수를 확보하면서 부족한 주파수를 보완했다. 올해 말까지 총 2만6000개의 기지국을 증축해 경쟁사 대비 뒤지지 않는 4G 네트워크 품질을 갖춘다는 목표다.
소프트뱅크와 스프린트 양사 모두 스웨덴의 에릭슨 통신장비를 사용하고 있어 호환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이에 단말기 협상에서도 제조사와 유리한 교섭이 가능할 뿐 아니라 주문형 단말기를 요구할 수도 있다. 네트워크 품질을 위한 설비투자와 다양한 단말기 라인업을 갖추는 것은 LTE 시장 승자가 되기 위한 핵심요소다.
◇소프트뱅크의 서비스 혁신, 美 시장 흔든다=적자의 늪에 빠진 스프린트를 회생시킬 전략은 소프트뱅크 특유의 `서비스 혁신`에 있다. 소프트뱅크는 지금까지 사업추진 과정에서 축적한 이른바 `V자 회복` 노하우를 스프린트에도 접목할 계획이다. 일본에서 성공을 거둔 상품과 관련 전략을 미국 시장에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사는 2008년 일본 시장에 아이폰 도입 시, 단말할부제와 단말할부금에 상응하는 금액을 통신 요금에서 할인해 주는 `쯔키쯔키와리` 제도를 도입해 `0엔 아이폰`을 내놓는 등 혁신적인 서비스를 다수 선보였다. 요금과 통신 속도만 내세우는 미국 시장에 새로운 가치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는 대목이다.
소프트뱅크는 모든 조직 구성원에 영업 DNA를 심고 세컨드폰 수요를 만들어내는 등 마케팅 전략에도 혁신을 감행해 왔다. 다양한 콘텐츠 기반의 차별화 서비스도 예상된다. 현재 소프트뱅크는 960여개 협력사를 통해 막대한 콘텐츠 연계 서비스를 지원한다. 이들 역시 소프트뱅크를 통해 미국 시장 진출 기회를 얻었다.
소프트뱅크는 자사를 `통신 기업`이 아닌 `ICT 기업`으로 칭한다. 컨버전스 시장을 창출하겠다는 의지다. 이 과정에서 특히 애플과 공조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내놓을 것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소프트뱅크는 자타공인 세계에서 애플에 가장 우호적인 이동통신사다. 전문가들은 이통사 통제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운 서비스 전략을 전개하고자 하는 애플이 소프트뱅크와의 끈끈한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미국 시장에 새로운 혁신을 선보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선 스프린트의 아이폰 보조금 정책부터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미나기자 mina@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