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거래, 글로벌시장서 해법찾다]<5>자율화와 규제의 절묘한 조화, 싱가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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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중계무역항의 도시국가 싱가포르. 국토 면적은 서울시의 1.2배에 불과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우리의 갑절이 넘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넉넉하다. 전력 부문에서도 공급 예비율이 50%에 가까울 정도로 풍요하다. 좁은 국토와 부존자원의 부재, 급격한 경제성장 등 우리나라와 많은 점이 닮아 있지만 전력 부문에서만큼은 부러울 정도로 안정적 시장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에서도 가장 안정적으로 전력 자율화를 추진하는 곳으로 꼽히는 싱가포르 전력 거래시장을 찾았다.

[전력거래, 글로벌시장서 해법찾다]<5>자율화와 규제의 절묘한 조화, 싱가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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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멀라이언파크

사자의 머리와 인어의 하반신이 섞여 있는 멀라이언. 싱가포르의 어원인 사자와 항구도시 이미지를 합성해 만든 대표적 상징물이다. 싱가포르의 전력시장은 마치 멀라이언을 보는 듯하다. 시장 자율화를 이용해 참여 사업자와 전력 설비 등 외적인 확대를 이끌어내면서도 강력한 규제로 시장독점 및 가격 왜곡 같은 부작용은 강력하게 예방하고 있다.

◇적극적 외자 유치로 시작된 전력거래 자율화

싱가포르 역시 초기 전력 산업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정부 중심 수직통합적 구조였다. 1995년 전력산업 분야 공기업화를 시작으로 자율화 도입 기초 작업을 시작했고 2003년 도매 전력 시장을 개설하며 본격적인 민간기업 시장 참여를 유도했다.

지금은 발전과 송배전, 판매 부문으로 정부기관과 민간기업이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가 네트워크인 송배전 망은 여전히 정부기관인 테마섹 산하 SP파워 그리드가 담당하고 있다. 발전은 테마섹 산하에 있다 매각된 `YTL 파워세라야` `세노코 에너지` `투아스 파워`를 중심으로 여덟 개 회사가 경쟁을 벌이고 있다.

판매 부문은 공기업인 SP서비스를 중심으로 여섯 사업자가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거래시장은 전력 계통담당 운영사인 EMC(Electronic Compatibility Arrangements)가 맡고 있다.

싱가포르의 전력거래 자율화는 이들이 경제성장을 위해 정책적으로 추진했던 적극적 외자 유치 역사와 관련이 깊다.

1965년 말레이시아연방에서 독립한 싱가포르는 생존을 위해 경제성장 총력 정책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외국기업 세금 혜택과 같이 글로벌 기업 유치에 과감한 방법을 동원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주롱섬에 산업단지를 건설하고 외국기업과 투자자에 최장 10년 가까이 법인세를 면제해 줬다. 해외 자본의 낮은 세금 혜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싱가포르는 국방 분야를 제외한 전 산업 분야에서 외국인 투자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이 같은 개방 정책은 전력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 전력을 거래하는 전력거래소 EMC를 설립할 때도 기술 이전 및 자본 유치 차원에서 뉴질랜드 전력 시장운영 회사인 M-co와 합작했다. 개방 정책은 더 많은 발전설비와 사업자가 시장에 참여하도록 유도했고 국민소득 5만달러의 고속성장이 가능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다.

◇순차적 거래 자율화로 부작용 최소화

싱가포르의 전력 거래가 안정적 시장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자율화는 추진하지만 그 속도는 엄격히 조절한다는 것이다.

1995년 시작 단계부터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단계적 시장 자율화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 판매사업자에 시장이 개방된 곳은 한 달간 전력사용량 1만㎾h 이상 사업장으로 아직 120만가구에 달하는 일반 가정 시장은 공기업인 SP서비스가 전력을 판매하고 있다. 연도별로 필요한 만큼만 시장을 개방하고 개방한 만큼 필요한 제도를 도입해 사회 혼란과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있다.

전력거래 시장을 유지하고자 적용하는 제도·규제는 크게 △발전시장 독점 금지 △발전사업자 시장진입 유도 △시장점유율에 따른 전기요금 조작 방지 세 가지 틀에 맞춰져 있다.

발전시장 독점 금지는 전력 자율화 초기 공기관인 테마섹 산하 3대 발전사업자 시장 독점을 막으려는 조치다. 싱가포르에서는 고효율 발전설비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모든 설비를 거래시장에 입찰할 수 없다. 싱가포르 전력청은 하나의 발전사업자가 송전망에 연결할 수 있는 총전력량을 국가 전체 전력량의 30%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발전사업자 시장 진입을 유도하는 제도로는 계약거래를 시행 중이다.

계약거래는 최근 국내 전력 시장에서 새롭게 도입이 논의되고 있는 제도다. 우리나라는 이 제도를 높아만 가는 도매전력 시장 가격을 낮추고 일부 발전사업자 초과이익을 막는 차원에서 검토하고 있다.

이와 달리 싱가포르는 시장 개방에서 발전사업자의 적자 위험을 방지하고자 도입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거래시장의 가격변동이 안정적이고 전력공급량도 충분해지면서 계약거래보다는 시장거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전기요금 조작 방지는 공기업인 SP서비스 시장점유율을 견제하는 조치다. 아직 일반 가정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SP서비스는 37%의 판매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월별 사용량 1만㎾ 이상 고객은 거래시장에서 판매사업자 영업이 가능하지만 SP서비스가 점유율을 이용해 가격경쟁 상품을 내놓으면 시장경쟁은 무너질 수도 있다. 싱가포르 전력청은 SP서비스의 가격결정 권한을 다른 곳으로 이관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SP서비스의 전기요금은 우리나라의 전기위원회 격인 RCP가 3개월마다 결정한다.

별도 위원회가 전력판매 공기업의 전기요금을 승인한다는 점은 우리나라와 같지만 싱가포르는 원가를 철저히 반영한다는 점이 다르다. SP서비스가 일반 가정에 공급하는 전력은 국제유가 변동비에 따른 도매시장 평균 전력요금에 송전 손실비를 합쳐 ㎾h당 250원 정도에 책정되고 있다.

강력한 규제로 시장 자율화 속도를 조절하고 있지만 제도와 규제를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맞추는 법은 없다. 부정부패 척결과 청렴 사회 구현으로 대변되는 싱가포르 정부의 정책 의지가 전력 분야에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전력시장 자율화 작업은 2003년도 수립된 소매시장 개설 추진일정에 맞춰 진행되고 있으며 제도 신설이 그 일정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다.

테이 카이 순 싱가포르 전력청 규제부문 책임연구원은 “무엇보다 시장을 일부 사업자나 기관에 귀속시키지 않고 형평성 있게 운영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기관의 권한에 근거해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식이 아닌 미리 짜놓은 로드맵에 맞춰 규제를 운영해야 시장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막바지에 접어든 거래시장 자율화

싱가포르의 전력거래 자율화 작업은 내년이면 막바지에 접어든다. 싱가포르 전력청은 내년 1월 사용량 8000㎾h, 10월 4000㎾h 이상 사용 고객까지 민간시장에 개방한다는 계획이다. 그 이후부터는 120만 일반가정 시장까지 완벽한 시장자율화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싱가포르 시장자율화 로드맵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율화 순서와 규모, 일정 등이 아닌 해당 계획에 대한 각 이해당사자의 공감대 형성이다. 우리나라가 전력시장 구조개편 관련 경쟁 도입을 놓고 각 집단이 갈등을 벌이는 것과 상반된 모습이다.

발전사업자, 거래시장 운영사, 그리고 전력청까지 전력산업에 관계된 모든 이가 2014년까지 계획된 일정을 추진하고 이후 완전자율화에 돌입한다는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가 전력거래 시장에 경쟁체제를 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블랙아웃을 걱정할 정도로 전력 공급예비력이 부족한 이유가 크다. 발전만 민간에 개방된 현행체제를 유지하거나 한국전력공사로의 시장 통합 주장 역시 시장개방에 따른 전력위기를 근거로 하고 있다.

반면에 싱가포르는 경제성장에 따른 전력부족을 해결하고자 전력자율화를 도입했다. 시장을 개방하면서 발전사업자와 판매사업자를 끌어들였다. 지금은 전력예비율이 50%에 달해 추가설비 증설을 연기하고 있다. 가격도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지난해 ㎾h당 220원에 달했던 도매시장 가격은 올해 국제유가 하락과 공급안정이 겹치면서 190원 수준까지 떨어졌다. 시장개방을 전력위기를 넘기는 해결책으로 선택해 성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데이브 칼슨 EMC 사장은 “한국은 우리와 전력거래 시장이 유사하지만 정부가 시장가격과 사업자 진입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전력 시장을 정부주도로만 운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낮은 예비율을 해결하려면 사업자가 시장에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전력거래 자율화 일정

자료: 싱가포르 전력청

◆데이브 칼슨 EMC 사장 “완벽한 전력 거래시장은 없어…계속 배우고 진화해야”

“전력에 시장 개념이 도입된 것은 길어야 30년 정도입니다. 다른 금융시장에 비해 그 역사가 매우 짧고 아직 진화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당연히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시스템은 없고 서로가 벤치마킹하며 그 부족한 점을 채워가야 합니다.”

데이브 칼슨 EMC 사장은 국가별 전력 거래 시스템이 서로 공유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막 정착 단계에 있는 시장개념으로 앞으로 등장할 수 있는 변수도 많고 추가해야 할 이론도 많은 만큼 시장별 운영사례와 시행착오에 기반을 두고 자국의 고유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EMC 역시 설립 초기 우리나라의 전력거래소를 방문해 거래시스템을 벤치마킹하고 상호 MOU를 교환했던 바 있다. 뉴질랜드, 영국, 미국, 그리고 우리나라까지 다양한 전력 거래 노하우를 받아들인 싱가포르는 지금 자신만의 거래시장을 확립하는 중이다. 지난해 공동 설립자였던 뉴질랜드 M-co 지분을 EMC가 사들이기도 했다. 본격적 거래시장 홀로 서기 작업에 들어간 셈이다.

칼슨 사장은 싱가포르 전력 거래시장을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모델로 규정하고 있다.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단계적으로 시장을 개방하는 만큼 향후 다른 개발도상국가가 전력 자율화를 도입하는 데 가장 부작용이 적은 모델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더 나아가 중남미, 아프리카 등 신흥 개도국 전력 거래시장 자율화에 싱가포르 모델로 컨설팅 사업을 벌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전력 거래시장 자율화 컨설팅 사업을 구상 중인 칼슨 사장도 최종 종착지만큼은 국가별로 차별화된 모델 정립을 추천하고 있다. 산업을 통틀어 가장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시장인 만큼 국가 정책기조, 사회적 수용성, 자본 구조, 국가 청렴도, 경제성장 구조 등 다양한 곳에서 그 나라만의 변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가장 안정적 전력시스템 운영국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좁은 국토에 따른 통일된 계획발전, 강력한 정책 권한, 서비스 중심 산업구조, 일정한 기온과 전력사용패턴 등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

칼슨 사장은 “여러 조건에 따라 전력 거래시장은 개방과 통합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고 그 어느 하나도 정답은 없다”며 “다만 싱가포르는 개방을 선택했고 그 선택으로 예상했던 전력공급 안정화와 요금 인하와 같은 긍정적 요인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걱정 없는 나라 싱가포르 이젠 수출까지?

싱가포르가 넘쳐나는 전력을 이웃나라에 수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여름 전력피크에다 원전 부품 위조사건으로 국가적 전력수급 위기에 빠진 우리나라와 정반대 상황이다.

싱가포르 발전 업계에 따르면 싱가포르 정부는 최근 유휴 전력설비를 해외 전력수출 용도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싱가포르 발전 및 전력판매 기업인 샘코프의 데니스 푸 상무는 “싱가포르에 다수의 민간기업이 참여하면서 전력 생산 설비 여유가 넘쳐나는 상황”이라며 “발전사업자 간 과다 경쟁으로 전력가격 인하가 심화되면서 이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싱가포르 전력청을 중심으로 수출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싱가포르의 전력예비율은 50%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전력피크 때와 비교하면 열 배에 달한다. 남는 전력에 예정돼 있던 신규 설비 건설도 늦추고 있다. 샘코프 역시 계획대로라면 주롱섬에 100㎿급 추가 LNG 발전소를 건설해야 하지만 예비력이 남아 건설을 연기하고 있다.

현재 전력 수출지역으로 예상되고 있는 곳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다. 이 지역은 싱가포르의 주력 발전원료인 가스를 도입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공식적으로는 국가 안보 차원에서 전력을 이쪽 지역으로 송전하는 일은 없고 정전 등 위급 시에만 송전한 사례가 있다.

싱가포르는 우리나라와 같이 천연자원이 없는 곳이지만 전력을 제2의 국가에너지로 키우고자 2003년부터 시장을 개방하며 민간사업자 및 해외자본을 적극 유치했다. 그 결과 발전연료의 LNG 의존도가 높음에도 사업자 경쟁으로 충분한 전력예비율을 확보하고 있다.

푸 상무는 “전력예비율이 상승에 따른 사업자 간 가격 경쟁으로 전기요금이 낮아지고 있는 추세”라며 “사업자 입장에선 싱가포르 전력청이 전력 수출로 예비율을 30% 수준으로 맞춰주기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