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38>반도체, 사선에 서다

민관이 IMF 위기 극복에 총력을 기울이던 1998년 6월 10일. 대규모 사업교환, 이른바 정부의 빅딜 추진이라는 폭탄 발언이 터져 나왔다.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국회의원, 새천년민주당 대표 역임, 현 변호사)이 빅딜을 공론화했다. 당시 빅딜 발언을 놓고 김대중 대통령과의 교감설, 혹은 김 실장의 실수설이 나돌았다. 하지만 진실은 교감설이었다. 김 실장이 의도한 빅딜 발언이었다.

한국능률협회(회장 송인상)는 이날 오전 7시 서울 조선호텔에서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을 초청, `김대중 대통령의 국가경영철학` 이란 주제로 조찬 강연회를 열었다.

김 실장은 조찬 강연에서 새 정부의 인사정책과 공기업 혁신, 근로자 권익보호 등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 대해 폭넓게 이야기했다. 그러던 김 실장이 강연 말미에 대기업 구조조정에 관해 간단히 언급했다. 하지만 핵심은 다 들어갔다. 순간 참석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기자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김 실장이 경제계에 일파만파를 불러일으킨 이른바 빅딜구상을 발표한 것이다.

“대기업 구조조정은 국가경제 운용뿐만 아니라 단위 기업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빅딜을 포함한 대기업 구조조정 계획이 금명간 발표될 것입니다. 어떤 재벌기업인지 말씀은 드릴 수 없습니다만 그 재벌은 빅딜을 상당히 우려도 하고 또 약간 거부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어제 제가 들으니까 승복을 했다고 합니다.”

김 실장이 말한 어떤 재벌기업은 LG그룹이었다. 기자들이 김 실장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의 발언은 곧 대통령의 뜻이었다.

“대기업 구조조정과 빅딜의 내용이 뭡니까?”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자 김 실장은 “자세한 내용은 박태준 자민련 총재(작고, 포철회장, 국무총리 역임)에게 물어보라”며 공을 박 총재로 넘겼다. 기자들이 득달같이 박 총재에게 달려가 질문 공세를 폈다. 박 총재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나는 빅딜은커녕 스몰딜도 모른다.”

김중권 비서실장의 증언.

“당시 빅딜 발언은 의도적이었습니다. 실언(失言)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대기업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하고 은밀하게 진행했습니다. 이 일은 김대중 대통령과 박태준 총재, 그리고 비서실장인 저만 아는 내용이었습니다. 청와대 수석들도 몰랐습니다. 그날 제가 발언한 것은 더 이상 대기업들이 이 일을 미루거나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어느 그룹이건 기업에 대한 애착심이 없겠습니까. 당시 박 총재에게 이 일을 물어보라고 한 것은 박 총재가 빅딜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 비서실장이 대기업 구조조정계획 발언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 방문(6월 6~14일) 중이었다. 김 실장의 빅딜 발언에 관해 김 대통령을 수행한 강봉균 청와대경제수석(정통부 장관, 재정경제부 장관 역임, 현 군산대 석좌교수)은 “사전에 논의한 바가 없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국내 여론이 들끊자 미국 LA에 머무는 김 대통령에게 전화해 국내 상황을 보고했다.

김 실장의 말.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충격파를 줄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발언했던 것입니다. 발언이 있자 당에서도 난리가 났어요. 그런 사실을 당에서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박태준 총재는 그런 사실을 부인했을까.

“대기업들이 호랑이 어금니 아끼듯하는 사업을 업종교환을 해야 한다”는 발언은 파장이 컸다. 이런 일은 은밀하게 외부개입 냄새를 풍기지 않고 자율적으로 추진해야 할 사안이었다. 이런 일을 대통령 비서실장이 의도적으로 발설했으니 박 총재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박태준 총재는 빅딜에 깊숙이 관여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이미 포스코경영연구소를 통해 빅딜 안을 마련했다.

김 당선인은 1월 21일 대통령직 인수위 사무실에서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 박태준 자민련 총재를 만나 재벌총수의 개인 재산출자와 사업교환 등 재벌의 고통분담과 근본적인 개혁을 강력히 촉구한 적도 있었다.

신국환 당시 박태준 총재의 경제특보의 말.

“김 대통령이 당선 직후 경제를 잘 아는 박 총재에게 빅딜 안을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박 총재는 포스코경영연구소에 이 연구를 맡겨 구체적인 안을 만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중복투자를 막고 전문화 특성화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은 삼각 빅딜 구상이었습니다. 자동차는 현대, 반도체는 삼성, LG는 석유화학 이런 식이었습니다.”

신 특보는 상공부에서 수출진흥과장, 기계공업국장, 전자전기공업국장, 공업진흥청장을 거쳐 산업자원부 장관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그해 6월 14일.

8박 9일간의 미국 방문을 마치고 김대중 대통령이 귀국했다. 재계의 시선은 김 대통령에게 쏠렸다. 김 대통령이 빅딜에 대해 어떤 발언을 할지가 관심사였다.

서울 성남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은 예상을 깨고 강도 높은 대기업 개혁을 주문했다. 김 대통령은 방미성과 기자회견에서 “빅딜이건 작은 딜이건 기업들은 반드시 개혁을 해야 한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5대 그룹의 구조정과 빅딜에 대해 “5대 그룹이 앞장서서 개혁을 해야 한다”며 “5대 그룹을 포함한 모든 기업이 국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대통령은 “성공을 하더라도 5대 그룹의 공이 클 것이고, 실패하면 5대 그룹이 국민 앞에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며 “부실채권이 100조원이 넘는 기막힌 현실에서 국민 부담이 늘어가는 현실을 용납할 수 없으며, 정부가 이 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김 대통령은 “6월 20일까지 부실기업 명단작성이, 6월 말까지 부실은행에 대한 심사가 끝나기 때문에 이대로 가면 10월까지 은행과 기업 구조조정을 마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중권 비서실장의 증언.

“청와대로 오신 김 대통령이 `김 실장, 박태준 총재는 좋은 기회를 놓쳤어`라며 아쉬워 하시더군요. `무슨 말씀이냐`고 했더니 `김 실장이 빅딜 발언을 한 후 기자들이 박 총재에게 내용을 물었을 때 빅딜의 필요성과 한국기업의 방향, 경제 전반에 관해 소상히 말했으면 그는 경제 영웅이 됐을 텐데`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김 대통령이 확고한 빅딜 의지를 밝히자 대기업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김 대통령의 대기업 개혁의지를 기업들이 확인한 까닭이다. 실제 대기업 구조조정에 관해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논리가 절대 우세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이 대기업 개혁을 강조한 이후 이런 논리는 뒤로 숨고 말았다.

그해 7월 4일 낮 청와대.

김대중 대통령은 김우중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대행을 비롯한 회장단 14명과 오찬 회동을 가졌다. 이날 회동에는 김 회장과 이건희 삼성 회장, 정몽구 현대 회장, 구본무 LG 회장, 김석준 쌍용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조석래 효성 회장, 박정구 금호 회장, 장치혁 고합 회장, 현재현 동양 회장, 신명수 신동방 회장, 김각중 경방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 부회장, 손병두 전경련 상근부회장(서강대 총장 역임. 현 숙명학원 이사장)이 참석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회동에서 인사말을 한 뒤 토론 사회는 김우중 회장에게 넘겼다. 김 대통령은 관 주도가 아닌 민 주도를 강조하며 사회를 김 회장이 맡도록 했다.

회동에서 김 대통령과 전경련 회장단은 9개 항에 합의했다. △기업은 수출증대에 매진하고 정부는 수출입 금융 정상화에 노력 △금융 구조조정은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하며 빅딜은 해당기업들이 자율적으로 추진 △한계 기업은 정리하고 공정한 경쟁풍토 조성 △실업문제 해결을 위해 노사정위원회에서 실효성 있는 방안 강구 △재계와 중소기업은 동반자적 관계 △통합 재정 수지 적자 4% 수준까지 확대 노력 △공기업 민영화 경영혁신 과감하게 추진 △기업들이 구조조정과 경쟁력 향상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조성 등이다.

이날 회동에 대해 청와대는 사려 깊은 토론장이었다고 평가했다.

그해 7월 26일과 8월 5일 5대그룹 총수와 주요 경제부처 장관들은 1, 2차 정·재계 간담회를 열어 빅딜을 조기에 하자는 데 합의했다. 업종별 중복과잉 투자 실태를 분석해 자율구조 조정안을 마련키로 의견을 모았다.

당시 2차 간담회는 삼성그룹 승지원에서 열기로 했으나 언론에 이런 사실이 새나가는 바람에 장소를 바꿔 전경련회관에서 열었다.

그해 9월 3일.

손병두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이날 오후 5대 그룹 사업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는 5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참석했다.

손 부회장은 구조조정은 삼성과 LG, 대우, 현대, 한진 등 5대 그룹에 국한하고 그 대상은 반도체와 석유화학, 발전설비, 항공, 자동차, 철도차량, 정유 등 7개 업종이며, 그동안 이날 오전까지 이견을 좁히지 못했던 반도체는 현대전자 반도체부문과 LG반도체를 일원화하되 지분 비율은 계속 논의키로 했다고 밝혔다.

손 부회장은 “양사가 단일화 원칙에 동의해 지분율을 놓고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 현대 측은 지분율 7 대 3을 주장하고, LG 측은 5 대 5의 비율을 제시해 의견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조만간 결론이 날 것이다. 그 이상은 밝히기 곤란하다”고 말했다.

5대 그룹 구조조정의 업무라인은 그룹회장 직속으로 구조조정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그 아래 구조조정실무추진반을 구성키로 했다. 5대 그룹 총괄지휘는 김우중 전경련 회장대행이 맡고 손병두 상근부회장이 중간 역할을 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