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35>115년만의 첫 우편사업 흑자

기적은 멀리 있지 않았다. 마음이 곧 기적의 모태(母胎)였다.

1998년 6월 12일 정보통신부 회의실.

실·국장 인사를 단행한 배순훈 정통부 장관(현 S&T 회장)은 이날 첫 간부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우리나라 115년 우정사(郵政史)에 이정표가 될 기적의 싹이 움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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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부는 우정사업 선진화를 위해 1998년 7월 1일 배순훈 장관을 비롯한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픈 2001운동 선포식을 갖고 우편서비스 헌장을 발표했다.<방송통신위원회 제공>

신임 실·국장들이 돌아가면서 인사말을 했다. 석호익 우정국장(현 통일IT포럼 회장, ETRI 초빙연구원)의 순서가 돌아왔다.

“올해 안에 우편 업무 흑자를 기록해 흑자 원년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순간 회의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우정 역사상 우편사업에서 한 번도 흑자를 낸 적이 없었다. 우편사업은 만성적자 신세였다. 그런 우체국에서 올해 말까지 흑자를 내겠다니 배 장관 이하 간부들의 시선이 석 국장에게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배 장관이 물었다.

“무슨 수로 흑자를 냅니까.”

“지출은 줄이고 수입을 늘리면 됩니다.”

회의장에 가스폭발이 일 듯 웃음이 `빵` 터졌다. 너무도 당연한 이치였다. 진리는 간단했지만 문제는 실천이었다.

배 장관의 회고.

“석 국장은 당차고 추진력이 대단했어요. 그는 실·국장 인사를 앞두고 우정국장을 자원했습니다. 그가 간부회의에서 한 말이 씨가 돼 그해 말 우정 역사 115년 만에 처음으로 흑자를 냈습니다.”

그해 7월 1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원효로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현 우정공무원교육원)에서 배순훈 장관을 비롯한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픈(OPEN) 2001 운동` 선포식을 가졌다.

이날 선포식은 선진 우정을 구현하기 위한 경영 혁신 운동의 시발점이자 구조 개혁과 수익 창출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다짐의 자리였다.

선포식은 이 운동의 추진단장인 김동선 기획관리실장(정통부 차관, 방송위 부위원장 역임, 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이사장)의 경과보고, 영상물 상영, 배순훈 장관 격려사, 우편서비스헌장 선포, 결의문 낭독, 윤은기 국제기업전략연구소장(중앙공무원교육원장 역임)의 경영혁신 특강 순으로 진행했다.

배 장관은 격려사에서 “3만여 우정사업 종사원 모두가 이 운동에 적극 동참해 우정사업의 혁신을 이룩해 21세기에 우체국이 국민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우정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국민과의 약속으로 △우편물을 신속, 정확, 안전하게 배달하고 △배달 기준을 정하고 이행 결과를 정기적으로 공표하며 △우체국을 지역 종합정보센터로 만들고 △우편 서비스 불만을 신속하게 개선하고 잘못은 보상한다는 우편서비스 헌장을 발표했다.

정통부는 선포식에서 조직 재창조와 생산성 향상, 종사원 참여 정신을 바탕으로 △열린 마음 △열린 경영 △열린 네트워크를 실천해 우정사업을 선진국형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참석자들은 우정사업의 경영혁신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변화와 혁신의 선도자가 될 것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김동선 추진단장의 말.

“우정사업 혁신은 오래전부터 논의됐으나 실행을 못했습니다. 당시 우정개혁의 의지는 대단했습니다.”

이 오픈 2001 운동은 국영 조직인 우편사업에 민간기업의 경영기법을 적용한 첫 사례였다. 그 실천 전략은 서비스 품질 향상과 생산성 제고였다.

배 장관은 만성적자로 눈칫밥을 먹던 우체국을 지역 종합정보센터로 육성하고 다양한 수익사업을 전개하기로 했다. 우정사업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경영효율을 극대화하고 수익사업을 확대하기로 했다.

대우전자 회장 시절 탱크주의 광고로 유명세를 탔던 배 장관은 이번에는 우체국 모델로 나섰다. 석호익 우정국장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추진력으로 과감한 구조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그해 8월까지 조직을 재정비했다.

석 국장의 회고.

“우정사업에 헌신한 선임들을 승진시켜 내보내고 고시 출신의 젊은 인력을 대거 영입했습니다.”

우정기획과장에는 정경원씨(우정사업본부장, 정보통신산업진흥원장 역임), 우정개발과장에는 노영규씨(방송통신위원회 기획조정실장 역임, 현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 부회장), 국제우편과장에 김준호씨(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융합정책실장 역임), 국내우편과장에 왕진원씨(전파연구소 기준연구과장 역임), 우표실장에 박종석씨(현 부산지방우정청장)를 발령냈다.

석 국장은 부실 우체국 통폐합 작업에 착수했다.

국사기획담당인 김익환 계장(군포우체국장 역임)에게 전국 우체국 경영 상태를 정밀 분석해 적자 우체국 명단을 제출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김포공항과 대법원, 군부대, 대학 우체국이 적자의 진원지였다.

석 국장은 김포공항과 대법원에 공문을 보냈다. 우체국이 누적적자로 인해 폐쇄가 불가피한데 이 조치에 이견이 있으면 이의신청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김포공항과 대법원에서는 우체국 폐지 통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석 국장은 이들 우체국을 폐지하고 대신 우편 취급소를 설치했다.

정통부는 여세를 몰아 전국 적자 우체국 정리작업을 시작했다.

이 일은 외부 압력과 회유가 많았다. 정리 대상 지역구 출신 국회의원을 비롯해 유력인사들이 우체국 폐지 철회를 요구하는 압력을 넣었다. 국회의원들은 국회 예결위에서 배 장관을 상대로 질의를 하거나 직접 연락을 해 폐지 중단 압력을 가했다.

이때마다 배 장관은 우정사업 혁신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됐다. 그는 외부 압력에 늘 준비한 답변을 했다.

“알았습니다. 그 일은 우정국장 소관입니다. 제가 우정국장에게 이야기는 하겠지만 워낙 고집이 센 국장이라서….”

대학교 우체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총학생회장으로 출마한 학생이 `우체국 수호`를 공약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석 국장은 이런 압력에 대해 “어느 것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냉철하게 판단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편리함만 생각한다면 우체국이 많을수록 좋겠지만 그 비용은 결국 국민이 부담합니다”고 설득했다.

그는 군부대 우체국도 다수 정리했다. 다만 일반인에게 부대 내 우체국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준 곳은 정리대상에서 제외했다. 또 적자지만 면(面) 단위로 우체국이 한 곳인 지역은 그냥 두었다. 이렇게 정리한 우체국이 83개였다.

석 국장은 새해 예산 책정은 제로베이스 원칙을 제시했다.

석 국장은 “연말에 남은 예산을 억지로 사용하지 말라. 앞으로 예산편성을 전년도 예산을 참조하지 않고 제로베이스 방식으로 책정해 달라. 전년도 예산을 아낀 체신청에 우선적으로 예산을 배정해 주겠다”고 기준을 밝혔다.

석 국장은 우체국 환경 개선에도 적극 나섰다. 먼저 서울 광화문우체국 공간을 재배치했다. 과장이나 계장들이 넓게 사용하던 공간을 줄인 대신 이용자들의 공간을 대폭 확대했다. 거실처럼 편안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소파를 갖다 놓았다. 다른 공간에 민간 편의점을 입점시켰다. 일부 지역 우체국에는 인터넷카페를 운영하거나 우체국 대회의실을 지역 예식장으로 활용했다.

석 국장은 사업다각화도 추진했다. 편지봉투 뒷면에 광고를 넣었다. 우체국 창구에서 봉투나 경조 우편카드와 문화상품권, 소포 박스 같은 물품을 팔았다. 국제특급우편이나 국제소포 마케팅을 강화했다.

정통부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인센티브제를 도입했다.

석 국장의 이어진 설명.

“인센티브는 찬성도 있지만 반대가 더 많았습니다. 그동안 내부에서 논의는 했지만 시행을 못했어요. 그걸 제가 시행한 것입니다.”

석 국장은 별도 예산 290억원을 마련했다. 수익성과 생산성, 생산목표 달성 등 지표를 마련해 상위 50%에 해당하는 우체국에 기본금의 50에서 150%까지를 차등 지급했다.

세월만 가면 월급을 받던 공무원 사회에 인센티브제는 근무 패러다임을 확 바뀌게 만들었다. 민원인의 영원한 갑(甲)인 공무원들이 을(乙)로 돌아가 고객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석 국장은 우편물의 발송부터 도착까지 처리과정을 점검했다. 최다 12곳을 거쳤다. 철도 운송도 문제점이 드러났다. 철도 자체는 빠르지만 우편물을 모아 철도에 싣는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도 걸렸다. 우편물이 분실되거나 파손되는 사례가 많았다. 보상책임도 모호했다.

석 국장은 우편열차 대신 트럭을 이용한 육로운송 방식을 도입했다. 면 단위인 우편물 배달구역을 군(郡) 단위로 조정했다. 물류단계를 5단계로 줄였다. 아울러 집배원 1600명에게 오토바이를 지급했다. 1만3000여 집배원에게는 자전거를 지급했다.

국제특급우편 방문접수 확대로 시장 점유율을 15%에서 25.3%로 높였다.

돌아보니 업적이 쌓였다. 그해 말 우편영업 매출이 1조59억원을 넘었다. IMF라는 외환위기 속에서 전년에 비해 2.7%인 268억원이 늘어났다.

영업비용은 9987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3.4%인 346억원이 감소했다.

1884년 우리나라가 우편업무를 시작된 이래 115년 만에 처음으로 72억원의 흑자를 냈다. 만년적자를 내던 우편사업이 6개월여 만에 흑자 시대를 연 것이다. 혁신 과정은 힘들고 아렸지만 열매는 달았다.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석호익 국장은 이듬해 1월 인사에서 전파방송관리국장으로 전보됐다. 후임은 황중연 공보관(우정사업본부장, 한국정보보호진흥원장 역임, 현 개인정보보호협회 부회장)에게 맡겨졌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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