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사건_058] 남북 첫 IT합작사 설립 <2001년 8월>

2011년 12월 우울한 소식이 전해졌다. 남북한 첫 IT합작사인 `하나프로그람센터`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었다. 하나프로그람센터는 2001년 8월 남북한이 통일기반 조성을 위해 남한 하나비즈닷컴과 북한 평양정보센터(PIC)가 공동 투자해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 설립한 최초 남북IT합작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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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북한 IT인력양성 교육 과정`이 재개되면서 중국 단둥 시가지에 있는 `하나프로그람센타`가 모처럼 시끌벅적하며 활기를 찾고 있다. 우리측 전문가들의 엄격한 심사를 통해 6기 과정에 선발된 북측 인력 31명이 예비교육(이론 강의 및 컴퓨터 그래픽 처리과정)을 받고 있다.

하나프로그람센터는 남북관계 경색 등으로 경영난을 겪어오다 문을 닫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모회사인 하나비즈도 잠정 휴업에 들어갔다. 설립 이후 큰 성과를 보이지 못하기도 했지만 남북관계가 크게 악화되며 수주실적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어려움에 봉착한 것이 폐업의 주된 이유였다. 하나비즈도 휴업이라고 하지만 향후 사업 재전개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프로그람센터의 폐쇄는 그나마 어렵게 명맥을 이어오던 남북IT협력의 중단을 의미했다.

◇남북 경제협력의 새로운 이정표=하나프로그람센터 설립은 남북경제협력의 새로운 이정표라 할 수 있다. 2001년 8월 남한의 하나비즈닷컴과 북한 PIC가 200만달러를 6(남한):4(북한) 비율로 투자해 설립됐다.

하나프로그람센터 설립은 2000년 4월 하나비즈의 설립으로 촉발됐다. 학생운동과 시민단체 활동을 하던 문광승 사장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금강산국제그룹 등과 공동으로 남과 북이 하나(HANA)가 되는 비즈니스(BIZ)를 한다는 뜻으로 세웠다. 이후 6월 남북한 정상의 6·15 공동 선언이 남북 협력사업에 불을 댕겼다.

문 사장은 북한 인사들과 안면을 트며 단둥-신의주 소프트웨어·멀티미디어 개발단지 조성사업을 북쪽에 제안, 센터 설립 논의가 시작됐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자동차로 10분이면 닿는 중국의 단둥과 신의주를 묶어 국제적인 소프트웨어·멀티미디어 전문개발단지를 만들자는 청사진이었다.


문 사장은 2001년 2월 남북IT협력민간기업단을 이끌고 북한을 처음 방문해 북한 민족경제협력련합회(민경련) 및 평양정보센터와 단둥-신의주 IT단지 조성을 위한 남북합작회사 설립에 합의했다. 첫 방문이었지만 협상은 순조로웠다. 북한이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당시 문 사장은 전자신문 인터뷰에서 당초 기대한 목표를 150% 초과 달성했다고 매우 흡족해했다.

“협상 과정에서도 북측은 남한 기업들을 맞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는 방침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습니다. 남측 IT기업들과 보다 폭넓게 협력해 나가려는 북측의 의지가 강고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상외였지요.”

협상장에 도착해서도 문 사장은 PIC 측에 “오늘 중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여기서 날을 새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 PIC 측이 몇 가지 문구 수정을 요구하는 선에서 남측 제안을 모두 받아들인 것이다.

“합의는 남북경협 사상 북한의 첫 IT 승인사업이라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북측에서 IT협력사업을 벌일 남측 기업들을 언제든지 받아들이고 우대하겠다는 것을 계약서에 명기한 것은 이번 방북에서 가장 큰 성과지요. 또 남한의 IT를 도입하겠다는 북측 내부의 강한 의지를 확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문 사장이 첫 방북을 마치고 전자신문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북한도 IT를 강성대국 건설의 핵심으로 간주해 기술협력 필요성을 인식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IT협력에 더 적극적인 의지 보여=이후 문 사장은 그해 3월과 4월에도 남북IT협력민간기업단을 이끌고 방북해 센터설립을 위한 구체적 방안 등을 논의하면서 센터를 공식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비즈는 북한과 협상을 진행하는 동시에 물밑으로 합작 법인 설립 작업에 착수했다. 센터 설립실무를 책임졌던 사람은 김병수 하나비즈 이사(현재 포원비즈 사장)다.

당시 김병수 이사는 중국 베이징에서 현지 거주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학원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학원 사업을 접고 귀국을 준비 중이던 그에게 대학교 선배였던 하나비즈 문광승 사장이 남북IT합작사 설립 실무를 맡아줄 것을 제의했다.

김 사장은 “중국에서 학원사업을 했고 중국 현지사정을 잘 안다는 이유로 문 사장이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IT는 잘 모르지만 설립과 운영에는 자신이 있어 2000년 9월 기획실장으로 합류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북한의 IT 수준은 남한에서 기대했던 이상으로 높았다. 남북IT협력민간기업단 2차 방북 때 동행했던 서현진 전자신문 논설위원은 당시 방북취재기에서 북한의 IT환경이 놀랄 정도였다며 상세히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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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2일 '하나프로그람센터' 시무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북한 IT 수준 예상외로 높아=`4박 5일 동안 북에 체류하면서 기자가 직접 확인한 북한의 IT 수준은 한마디로 예상외였다. 우선 PIC 및 김일성종합대학 정보센터에 설치된 컴퓨터는 거의 대부분 펜티엄Ⅱ 아니면 펜티엄Ⅲ급이었다. 또 컴퓨터들은 방마다 한두 대씩 설치된 스위칭 허브를 통해 근거리통신망(LAN)으로 연결돼 있었고, 선의 스파크서버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NT 기반의 PC서버도 간혹 눈에 띄었다. 이 같은 환경에서 개발되는 소프트웨어의 수준 역시 남쪽과 별다를 게 없었다. 이동전화나 PDA용 애플리케이션, 음성인식과 문자인식 도구 등은 오히려 남쪽보다도 우수해 보이기까지 했다.`(전자신문 2001년 2월 15일자 `방북취재기-IT가 희망이었네`)

하나프로그람센터의 개발인력은 북한 최고의 인재들이었다.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대를 졸업한 30여명의 인재들이 SW 개발을 담당했다. 하나비즈닷컴이 남한에서 SW패키지나 용역을 수주해 하나프로그람센터에 의뢰하면 단둥 상주 인력과 북한 내 평양정보센터가 연계, 개발을 해주는 방식을 취했다. 리눅스 기반 시스템 프로그램과 네트워크 관리 프로그램, 유니코드 IME 개발 외에 음성인식 및 멀티미디어 분야의 패키지를 개발했다. 또 북한 SW 전문가 대상 재교육 프로그램도 가동했다. 자바·임베디드·3D·무선 인터넷 등 교육 프로그램을 운용, 남북IT협력의 단초를 제공했다.

IT분야가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남과 북의 요구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북한은 어느 분야보다도 과학기술과 컴퓨터, 정보산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남한 역시 태부족한 전문인력을 해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강구하는 상황이었다. 윈윈 차원의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IT분야의 교류가 활기를 띨 수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남한기업의 미온적 태도로 일감 확보가 쉽지 않았고 남북 정치상황에 따라 사업 지속 불안감이 높아지는 때가 많았다. 하나프로그람센터를 결국 궁지에 몰아넣은 결정타는 2010년의 5·24조치였다. 정부는 천안함 피격사건(2010. 3. 26)에 대해 북한의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하기 위해 남북교류협력과 관련된 인적·물적 교류를 중단시켰다. 결국 하나비즈는 물량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하나프로그람센터는 설립 10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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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산 다산네트웍스 부사장

◆ 이상산 KISTI 슈퍼컴퓨팅센터장(현 다산네트웍스 부사장)

남북IT합작사 설립에는 다산네트웍스를 빼놓을 수 없다. 남민우 다산네트웍스 사장은 2001년 4월 남북IT협력민간기업단 3차 방북 때 동행했으며 2001년 7월에는 하나비즈의 지분 50%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하나프로그람센터의 경영을 맡게 된다. 이때 하나프로그램센터의 최고경영자로 내정, 중국에 파견된 인물이 이상산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슈퍼컴퓨팅센터장이었다. 이상산씨는 6개월간 중국에 근무하다 다시 KISTI로 복귀했으며 2년 뒤 다산으로 근무지를 옮겨 현재 다산네트웍스 부사장으로 지내고 있다.

이 부사장은 “북한에서 파견된 인력은 북한 최고 인재로 개발 능력은 남한과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디자인 등이 투박한 면이 있었지만 1~2년 정도 같이 일하면 남한 수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극복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이 부사장은 “인력을 원하는 대로 뽑고 해고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점이었다”고 말했다. 개별적으로 SW 개발자를 만날 수 없는 것도 애로사항이었다. 이 부사장은 “개발자와 일대일로 만나는 것이 불가능했고 북에서 파견나온 대표(개발실장)를 거쳐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졌다”고 회고했다.

이 부사장은 “비록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사업이 중단됐지만 남북IT합작사 설립은 큰 의미가 있다. 기술개발 과정에서 상호 단점을 보완하고 통일에 대비한 기술교류 협력을 확대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며 사업재개를 희망했다.


권상희기자 shkwo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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