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기통신공사 설립 4개월 뒤 대한민국 통신사에 길이 남을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일이 일어났다. 바로 한국데이타통신주식회사(DACOM·데이콤) 설립이다. 이름 그대로 데이콤은 데이터통신을 주력 사업으로 했다. 회사 공식 설립일인 법인 등기는 1982년 3월 29일 이뤄졌다. 한 달 뒤인 4월 28일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국제회의장에서 성대한 창립행사를 가졌다. 신생 통신사인 데이콤 창립 행사장에는 정계를 비롯해 관계, 학계, 산업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앞날을 축하했다. 성대한 출범식을 했지만 데이콤 출범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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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3월 설립된 데이콤은 2006년 9월 사명을 LG데이콤으로 변경했다. 2010년 1월 1일에는 LG파워콤과 함께 LG텔레콤(현재의 LG유플러스)에 합병되면서 데이콤시대는 막을 내렸다.

◇생면부지 환경서 회사 탄생=데이터통신은 컴퓨터와 통신선을 연결해 데이터를 전송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데이터통신이 무엇인지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수익을 낼지도 불투명했다. 당연히 데이콤에 투자하겠다는 곳이 없었다.

반면에 새로운 통신서비스를 전담할 회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정책 입안자들은 데이콤 앞날이 유망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민간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적극 나섰다. 먼저 통신 관련 기업을 불러 모아 투자 설명회를 했다. 하지만 반응은 썰렁했다. 전화 사업에 비해 시장규모가 작아 이익을 내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오명 체신부 차관까지 나섰다. 오 차관은 데이콤이 5년 안에 흑자를 낼 것이라며 기업 투자를 독려했다. 그제서야 기업들은 데이콤 투자에 관심을 보여 결국 20여 회사가 출자를 약속했다. 출자회사 자격은 한국전자공업진흥회 회원사와 TV방송국·통신사·한국전기통신공사 등으로 제한했다. 총출자액은 59억8000만원이었다.

최대 주주는 20억원을 출자한 KT였다. 삼성과 LG(당시 럭키금성), KBS, 대영전자도 3억~7억 원씩을 냈다. 연합통신·한국전자통신·중앙전기·대한전선·광림전자·국제전자·오리콤·제일정밀 등도 투자에 참여했다. 출자 한도액은 민간회사 그룹은 1개 그룹당 7억원 이하, 일반회사는 5억원 이하로 정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82년 1월 27일 체신부 회의실에서 데이콤 설립을 위한 발기인회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우재 한국통신공사 사장이 발기인 회장으로 선임됐다. 이어 데이콤은 1982년 3월 10일 26개 주주와 발기인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열고 초대 사장에 이용태씨를 선임했다.

데이콤의 초대 사장이 누가 될 것인지도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다. 후보로 떠오른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이용태 사장과 함께 성기수 KIST 시스템공학센터 소장도 유력 후보였다. 성 소장은 경제기획원 예산 업무와 체신부 전화요금 업무 등 정부의 각종 업무 전산화와 민간 업무 전산화를 도맡은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전문가였다.

반면에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을 지낸 이 사장은 삼보컴퓨터를 설립하는 등 기업가로 명성을 쌓고 있었다. 정보통신업계에 새 판을 짤 데이콤 사장을 놓고 격돌한 두 사람 경쟁에서 이용태씨가 승리했다.

데이콤이 기업이다 보니 기술 전문가보다 비즈니스맨이 더 낫겠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었다. 1983년에는 데이콤이 공중통신 사업자가 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전기통신법이 `전기통신기본법`과 `공중전기통신사업법`으로 분리, 제정됐기 때문이다. 정보통신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탄생한 것도 이 때다.

◇대한민국 첫 PC통신 시대 문 열어=데이콤은 정보통신 업무와 공중통신사업자, 행정전산망 전담 업체로 지정받으며 야심차게 여러 사업을 추진했다. 1986년에는 국내 최초로 PC통신 `천리안` 서비스를 시작해 데이터 기반 통신시장을 꽃피웠다. 1990년대 초까지 `음성통신은 한국통신, 데이터통신은 데이콤`이라는 구도 속에 데이콤은 전성기를 누렸다. 1991년 11월에는 국제전화 사업을 앞두고 이름을 데이콤으로 바꾸었다.

한 달 뒤인 1991년 12월 3일에는 식별번호 002를 사용하는 국제전화사업도 시작했다. 1995년에는 저궤도 위성통신(글로벌스타)사업에 참여했고 1996년에는 시외전화 서비스를 개시했다. 신규 통신사업에도 관심을 가져 한솔PCS 컨소시엄에 참여해 PCS사업권도 따냈다. 1997년에는 비대칭 초고속인터넷 서비스사업을 시작한 하나로텔레콤의 최대주주(10%)가 됐다.

인터넷이 부상하면서 쇠락하기 시작한 데이콤은 1999년 11월 반도체 빅딜로 LG그룹 계열사로 넘어갔다. 당시 LG는 동양그룹이 갖고 있던 데이콤 지분 18.56%를 전량 매입해 데이콤 지분을 50% 이상 확보했다. LG는 2000년 1월 데이콤과 데이콤 5개 자회사 등 6개사를 계열사로 공식 편입시켰다. 데이콤은 2002년 인터넷 사업과 e비즈니스 및 전화사업 등의 호조에 힘입어 창사 21년 만에 매출 1조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데이콤이 우리 통신사에 남긴 족적은 작지 않다. 인터넷데이터센터(IDC)와 웹하드, 무선인터넷전화 서비스 등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2006년 9월 22일 데이콤은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 사명을 LG데이콤으로 변경했다. LG데이콤은 2010년 1월 1일 LG파워콤과 함께 LG텔레콤(현재의 LG유플러스)에 합병되면서 데이콤 시대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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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4월 28일 서울 여의도 증권거래소 국제회의장에서 치러진 창립행사

◆28년간 화제를 몰고 다녔던 데이콤

국내 첫 정보통신 전문기업이었던 데이콤은 출범 때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대학 졸업자들에게도 최고의 직장으로 꼽혔다. 이는 데이콤이 첨단 통신회사라는 이미지와 함께 연봉이 국내 기업 중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데이콤이 최고 연봉 직장이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이야기는 데이콤 설립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이콤 설립은 정부의 강력한 정책 의지에 따라 이뤄졌다. 한국전기통신공사를 설립한 체신부는 데이터통신을 전담하는 회사를 만들기로 방침을 정했다. 전화를 주 업무로 하는 한국전기통신공사에 맡겼다가는 제대로 육성이 안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하는 시도였다.

이 작업은 체신부 내 통신정책국이 맡았다. 통신정책국은 1982년 만들어진 신생부서였다. 이 통신정책국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바로 데이터통신을 전담하는 회사, 데이콤 설립이었다. 체신부 실무진은 광화문 우체국에서 이 작업을 주도했다.

당시 우체국 골방에서 이 작업을 했다고 해 이 팀을 `골방팀`으로 불렀다. 데이콤과 관련된 각종 규정은 여기서 만들어졌다. 그 중 하나가 직원 보수다.

실무진은 보수를 책정하기 위해 여러 회사를 참고했다. 그 중 한국통신공사와 전자통신연구소, KBS, 금성사 등 이른바 잘나가는 4개 회사를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회사마다 보수 규정이 달라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직책수당, 판공비, 기타수당 등 드러나지 않은 보수가 문제였다. 당시 KBS는 단일 보수체계여서 사장이나 운전수나 보수가 같았다. 다만 직책에 따라 판공비와 수당 등이 달랐다. 이런 것들을 고려해 대학 졸업 후 5년차, 10년차가 됐을 때 받을 보수를 4개 회사와 비교해 가장 높게 산출했다. 체신부 실무진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갔다. 산출된 금액에 20%를 더해 보수를 책정한 것이다. 당연히 당시 데이콤은 신입사원 연봉 중 가장 많은 직장으로 꼽혔고 우수한 사람들이 데이콤에 몰렸다.

LG유플러스로 통합된 데이콤과 LG의 관계도 재미있다. 국내 첫 정보통신 전문기업이었던 데이콤은 몇 차례 대기업의 경영권 공격을 받았다. 1995년에도 그랬다. 당시 새로운 전기통신사업법이 발효돼 기본 및 부가통신사업에 대기업 참여 폭이 넓어졌다. 이 때문에 LG 등 대기업은 제2 시외전화사업권을 가지고 있던 데이콤을 인수하기 위해 경쟁했다. 1999년에도 데이콤은 또 한 번 대기업의 인수 대상이 됐다. 당시 통신사업자에 대한 동일인 지분 제한 규정이 삭제돼 데이콤을 인수하면 국제전화 등 새로운 전화사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LG그룹도 마찬가지다. 강력한 인수 희망을 피력했다. 특히 구본무 LG 회장은 1999년 4월 27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재계 간담회에서 “향후 정보통신사업을 주력사업으로 키울 것이며, 이를 위해 데이콤 인수를 희망한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구 회장은 1995년 2월 회장에 취임한 이후 종합유무선통신사업자라는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몇 년간 계속해 데이콤 인수를 강력히 추진했다. 마침내 LG는 1999년 11월 그렇게 원하던 데이콤을 품에 안았고 종합통신그룹으로 도약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방은주기자 ejb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