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사건_038] WTO 출범에 따른 개방 압력 고조 <1995년 1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하면서 세계는 무한 경쟁 시대에 돌입했다. 개발도상국인 한국으로서는 선진국이 가하는 각종 통상 압박에 시장을 개방하고 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보기술(IT)업계에서는 통신 시장과 콘텐츠 시장 개방 등 주권처럼 여겨지던 통신 인프라 시장을 해외 업체에 내 줄 수도 있다는 고민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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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공식로고

◇WTO체제 출범 의의=세계무역기구(WTO)는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를 대체하고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 이행을 감시하는 국제기구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을 겪으면서 세계는 관세를 이용한 보호 무역주의가 횡행했다. 서로 환율을 평가절하해 수출에서 이득을 얻으려는 시도도 많아졌다.

세계 1·2차 대전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세계 각국은 대공황과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기 위해 1949년 관세 장벽과 수출입 제한을 제거하는 내용의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체제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금융자유화가 시작되면서 금융파생상품이 등장하고 국제적 규모 금융사고가 빈발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하게 됐다. 기축통화인 달러가 약세를 지속하면서 미국과 다른 나라 간 교역 불균형이 발생했다. 기축통화 달러를 발행하는 미국과 양극 간 무역 체제에서 다극 간 무역체제로 변화하자는 것. IT가 발전하면서 여러 가지 국경을 넘나드는 기술 경제적인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의 장이 UR다. GATT체제 아래서 일련의 무역협상(라운드)이 세계 무역질서를 이끌었는데 1986년부터 1994년까지 마지막에 이뤄진 UR에서 WTO가 탄생했다. 세계 111개국은 1994년 4월 모로코 마라캐시에서 서명하고 1995년 1월 1일 WTO체제 출범을 선언했다. 상품 교역만 관장했던 GATT에 비해 WTO와 협정문들이 포괄하는 영역은 대폭 확대됐다. 서비스, 발명·창작·고안 등 무역관련 지식재산권이 추가 됐다. 국가 무역 분쟁에 대한 심의, 강제집행권을 이용한 조정권도 가졌다.

◇통상압력 강화=WTO는 `공정한 무역`을 천명하며 만들어졌지만 실제로는 상대적 평등보다 절대적 평등을 지향하는 체제다. 이미 부를 축적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같은 출발선에서 경쟁해야 했다. WTO 기능은 관세 인하와 비관세 장벽을 감축하고 국제무역관계의 차별철폐를 위한 실질적인 행동규범을 제공하고 이를 어겼을 때 제재하는 것이다.

WTO 체제의 기본 원칙은 △최혜국대우 원칙(MFN:Most-Favored Nation treatment) △내국민대우 원칙(National treatment) △상호주의 원칙 △시장접근보장 원칙 △투명성 원칙 5개다. 최혜국대우 원칙은 특정국가에 대해 다른 국가보다 불리한 교역조건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어느 국가에서 수입되는 상품에 관세나 과징금을 면지해주는 등 특전은 다른 국가의 동종 상품에도 차별 없이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국민대우 원칙은 수입품에 내국세나 국내규칙을 부과할 때 국내 상품보다 불리하지 않게 대우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를테면 국내에서 제조한 휴대폰에 세금 우대 혜택을 주거나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행위를 금지한 것이다.

◇한국 정부의 대응=한국은 무한경쟁시대로 이양하는 세계 무역질서에 대응하기 위해 1994년부터 일류화 상품을 지정해 경쟁력 강화를 꾀했다. 반도체 D램, 전자레인지, 컴퓨터 모니터, 앰프리시버, 초음파 영상진단기 등 15개 품목당 한두 업체를 일류화 업체로 선정해 해외시장 개척기금을 지원하고 표준화 작업에 돌입했다. 1995년에는 연불수출금융액을 2조6000억원에서 3조4000억원으로 확대 공급하고 수출보험기금 출연규모 역시 1600억원에서 2413억원으로 늘렸다. `공동상표 지원센터`를 설립해 해외상표 출원지도를 하고 모니터링 체제를 구축했다.

특히 통신개방시대에 대비해 정보화촉진기본법을 제정하고 1996년 1월 1일 시행에 들어갔다. WTO 체제에 편입된 이후 한국은 IT를 필두로 한 수출 전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WTO 분쟁해결제도도 적극 활용해 70% 이상 승률을 달성했다. IT업계에서는 하이닉스에 대한 EU와 미국의 D램 상계관세 분쟁에서 승소했다. 미국이 한국 반도체 D램에 대해 반덤핑 판정을 내린 데 대해서도 WTO에서 중재에 나서 승소를 이끌었다. 컬러TV 반덤핑, 통신장비 조달제도 등 제소와 피소가 잇달았지만 WTO 양자협의 단계에서 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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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 모로코 마라캐시에 모인 111개국은 마침내 WTO설립에 합의를 이끌어내고 서명했다. 이듬해인 1995년 1월 1일 WTO체제가 공식 출범했다.

◆통신 시장 개방과 IT업계 영향

WTO체제 출범 후 한국은 후속 협상에 돌입했다. 특히 WTO기본통신협상에 따른 세계 통신시장 개방과 맞물려 국내 통신서비스 독과점 시장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WTO협상에서 41개국은 기본 통신협상그룹(NGBT)을 구성해 다자간과 쌍무 협상방식으로 협의를 진행했다. 협상 내용 중 시장 개방에서 사업자와 외국 자본참여 제한 완화, 외국인과 내국인 동등 대우 등이 주로 논의됐다. 사업허가절차나 기준 등 규제를 풀고 상호 접속을 보장하게 했다. 당시 미국은 자국의 통신 대기업을 세계 각 통신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정부는 통신시장 전면 개방을 선언하고 1995년 개인휴대통신(PCS) 3개 사업자 등 통신 7개 분야에 30여개 신규 사업자 허가를 냈다. 1996년에는 시외전화와 위성통신서비스, 저궤도위성서비스, 양방향 무선호출 등 통신사업자 허가를 내고 통신 서비스 경쟁 시대를 열었다. 다만 대기업 참여를 제한하고 전용회선사업을 제외한 여타 30개 사업 중 21개는 대기업 허가신청, 지분참여를 일절 배제했다. 이른바 `통신사업 구조조정`이라고 일컫는 개방화 조치 덕분에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유·무선 통신 인프라를 보유한 국가로 발돋움하게 됐다.

하지만 통신 교환기 등 국내에서 보호를 받고 있던 기술 시장은 해외에 개방돼 쇠락의 길을 걸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AT&T 교환기가 국내에 도입돼 교환기 시장이 재편됐다. 삼성전자·대우통신·LG정보통신·한화전자정보통신 4사가 점유하고 있었다. 10여년이 흐른 2000년대부터는 통신 장비 시장에서 알카텔루슨트, 노키아지멘스네트웍스, 에릭슨(LG와 합작) 등 외산 업체가 50% 이상 점유하고 있다.

WTO체제에 대비한 전자·전기 업계 투자액이 대폭 늘었다. 1995년 시설투자는 8조9913억원 규모로 이전해 5조7273억원보다 57%가량 증가했다. 특히 생산능력 증대를 위한 제조업 투자가 많았다. 세계 경기가 호조를 보이고 있는데다 무역 장벽이 낮아지면서 수출에 유리해질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반도체 업계는 16MB D램 생산라인을 증설, 5조7800억원을 투자했다. TFT LCD에 대한 생산설비 투자도 전년도보다 56%가 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일본산 제품에 비해 경쟁력이 뒤떨어지던 가전 업계는 타격을 입었다. WTO 출범으로 시장이 개방되자 25인치 이상 대형 컬러TV·캠코더·VCR 등 TV 수입액이 1994년에 비해 194% 늘어났고 전자레인지는 64.7%, 전기다리미 123.4%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여 우려를 자아냈다.


오은지기자 onz@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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