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사건_067] 동북아 IT R&D허브 도전 <2003년>

2003년에는 글로벌 기업들이 마치 유행처럼 한국을 연구개발(R&D) 거점으로 지목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IT 산업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면서 우리나라가 전 세계 테스트베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첨단 분야 기술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바로 테스트해볼 수 있는 곳, 한국은 IT R&D의 더 없는 조건을 갖췄다. 정부도 글로벌 기업들의 R&D 센터 유치에 팔을 걷어붙였다. IT산업이 급성장한 한국을 `동북아 IT R&D의 허브`로 만든다는 구상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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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은 2003년 10월 24일 정보통신부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 정부와 공동으로 국내에 유비쿼터스 컴퓨팅 연구소(IBM UCL)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왼쪽부터 IBM UCL 연구소장 이호수 박사, 한국 IBM 신재철 사장, 정보통신부 양준철 국제협력관.

정보통신부장관은 물론이고 대통령까지 글로벌 IT 기업들의 수장을 만나 우리나라의 강점을 역설하고 R&D 유치 약속을 받아냈다. 8월 인텔이 스타트를 끊고, IBM과 HP 등 거대 IT 기업들의 진출이 이어졌다. 비록 몇 년이 지난 후 많은 기업들이 R&D 센터를 철수하기에 이르렀지만, 당시 R&D 센터의 한국행은 세계 IT 시장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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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환 ETRI 원장과 패트릭 겔싱어 인텔 CTO가 2004년 3월 8일 조선호텔에서 열린 '인텔 R&D센터 발족식'에서 가정자동화와 차세대 홈서버에 관한 공동기술개발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악수하고 있다.

◇2003년, 글로벌 기업R&D 센터 설립 잇따른 발표=인텔의 CEO였던 크레이그 배럿 회장은 2003년 8월 한국을 방한해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한국에 R&D 센터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인텔의 이 같은 결정은 노 대통령이 5월 미국을 방문하며 외자 유치를 위한 세일즈 외교를 펼친 데 대한 첫 가시적 성과로 평가받았다. 약 7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인텔의 R&D센터는 2004년 3월 한국에 문을 열었다.

인텔 R&D 센터는 혁신적인 첨단 무선통신 기술과 디지털홈 관련 차세대 플랫폼 기술 개발에 주력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텔이 한국의 IT 업계, 정부와 새로운 기술개발을 하거나 표준을 만들 때 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R&D 센터 개소식에서 인텔과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홈네트워크를 통한 멀티-스트림 미디어 배포(Multi-Stream Media Distribution)와 가정 자동화(Home Automation) 및 차세대 홈 서버에 관련된 새로운 기술을 공동 개발하자는 양해각서를 교환하기도 했다.

두 달 후 인텔에 이어 IBM도 R&D 센터를 서울에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보통신부와 한국IBM은 2003년 내 서울 도곡동에 800평 규모의 `IBM 유비쿼터스 컴퓨팅 연구소`를 개설하기 위한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 연구소는 개설 후 첫 번째 프로젝트로 향후 4년간 3200만달러를 투자해 텔레매틱스와 임베디드 소프트웨어 분야 기술 개발을 추진했다. 투자비는 정통부 산하 정보통신연구진흥원(IITA)과 IBM이 1600만달러씩 분담했다. 텔레매틱스는 위치정보 기술을 바탕으로 자동차 운전자와 탑승자에게 교통안내, 긴급구난,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술이다. 또 임베디드 소프트웨어는 각종 IT기기에 내장돼 다양한 기능을 구현한다. 두 기술 모두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기반 핵심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인력은 IBM 본사 연구소의 핵심 연구원과 한국IBM의 기술연구원 등이 주축이 됐다.

곧이어 HP도 R&D 센터 설립을 발표했다. 코리아 디벨러프먼트 센터(KDC)라는 명칭의 이 연구소는 HP의 일곱 번째 글로벌 연구소가 됐다. HP의 연구소 설립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미국 순방 시 추진된 일이다. 노 대통령을 수행한 진대제 정통부 장관이 칼리 피오리나 HP 회장을 만나 한국에 R&D 센터를 설립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협의가 시작된 것이다. HP는 5년간 KDC에 약 4000만달러를 투자하며, 이와 별도로 정통부도 연구 프로젝트별로 비용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미국 AMD와 일본 후지쯔의 플래시 메모리 합작사인 스팬션도 한국에 시스템엔지니어링 센터를 설립했다. 애질런트 테크놀로지의 에드워드 반홀트 회장은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을 만나 한국 내 R&D 센터 설립에 관한 양해각서를 교환하기도 했다.

이처럼 2003년 하반기에는 글로벌 기업들이 거의 매달 R&D 센터 설립을 발표할 만큼 러시를 이뤘다. 당시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도 R&D 센터 설립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들 외에도 일본의 스미토모나 러시아 국립광학연구소(SOI) 등이 국내에 R&D 센터 설립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야말로 한국이 글로벌 R&D의 요충지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화려한 출발, 결국 용두사미로=정부와 업계의 기대감을 한 몸에 받은 글로벌 IT 기업들의 R&D 센터였지만 실적은 기대 이하였다. 스포트라이트를 가득 받았던 R&D 센터는 세계 경기 침체와 함께 구조조정 1순위에 올랐다. 철수되거나 남았어도 대부분이 유명무실해졌다.

가장 먼저 한국 R&D 센터 설립을 발표했던 인텔은 설립 후 3년 만에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2007년 1월 인텔은 본사 차원에서 진행 중인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2004년 3월 경기도 분당의 한국 R&D 센터를 철수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인텔 R&D 센터가 한국전자통신연구원과 함께 진행한 홈네트워크 기술 개발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2003년 이후 한국에 진출했던 R&D 센터는 2007년 세계 경기가 침체기로 접어들자 쓰나미가 일 듯 줄줄이 철수했다. 2005년 10월 설립한 내셔널세미컨덕터 R&D 센터도 인텔 R&D 센터가 철수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간판을 내렸다.

HP도 정통부와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고 했으나 연구 실적은 나오지 않았다. IBM의 유비쿼터스컴퓨팅 연구소는 최근 다른 연구조직에 흡수됐다. 이처럼 2003년부터 불었던 `동북아 R&D 허브`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잇따른 철수 발표에 업계는 정부의 R&D 센터 유치정책 전반에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선진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국내 기업과의 역차별이라는 비판을 감내하며 파격적인 조건과 지원을 약속하고 유치한 R&D 센터였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보다 좋은 조건에 공간을 제공하고, 공동 R&D를 진행할 때 정부와 정부 산하기관이 적극적으로 투자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기업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한국을 떠나갔다. 이후에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글로벌 기업의 R&D 센터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속 없는 실적 올리기라는 비난이 일기도 했다. 게다가 2년여간의 활동에도 큰 성과가 없자 글로벌 기업들의 한국 R&D 센터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따가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한국의 기술력을 끌어올려줄 수 있는 선행 기술 연구보다는 한국을 그야말로 테스트 삼아 엔지니어링 수준에 그치는 연구만 진행했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가 경기침체로 몸살을 앓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R&D 센터도 성과를 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R&D 예산 전체를 삭감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예외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또 국내에서 글로벌 연구진과 함께 R&D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전문 인재를 양성하게 된 것도 나름의 성과라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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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IBM과 정보통신연구진흥원(IITA)은 2003년 10월 24일 하얏트호텔에서 '유비쿼터스 컴퓨팅 연구소(IBM UCL)' 설립 등에 관한 협약식을 가졌다. 왼쪽부터 이호수 IBM UCL 소장, 닉 도노프리오 IBM 수석 부사장, 신재철 한국IBM 사장, 김태현 정보통신연구진흥원 원장, 진대제 정통부 장관, 김태유 청와대 정보과학기술 보좌관.

◇반도체 디스플레이, 한국이 다시 거점으로=2010년을 전후해 한국에 다시 R&D 센터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는 지난 2003년 글로벌 기업들의 한국행과는 분명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다. 철저하게 시장 논리가 앞선 것이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지원을 약속하며 유치하지 않아도 글로벌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한국에 R&D 센터를 설립하고 나섰다. 대부분 한국이 세계 1위로 우뚝 올라선 분야의 후방 산업에 종사하는 기업들이다.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1등 기업을 위해 R&D 거점을 옮긴 것이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곳은 일본 기업들이다. 일본 업체들의 한국행에는 대지진 여파 등으로 인한 해외 생산 거점 이전과 중국 시장 교두보 전략의 의미도 있다. 디스플레이 장비 제조업체인 알박은 2011년 외국계 장비업체로는 최초로 한국에 연구소를 설립했다.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인 도쿄일렉트론도 R&D 시설을 세우기로 했다. 반도체 검사 장비 선두업체인 어드밴테스트는 아예 한국을 연구와 생산 거점으로 삼기로 했다. 일본 단일 사업부를 통째로 한국으로 옮기고 9월께 통합 생산 공장을 가동한다.

생산 기지를 구축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일본 테이진은 국내 필름 가공 전문업체인 CNF와 공동으로 충남 아산에 2차전지 분리막 합작법인(테이진CNF코리아)을 신설했다. 도다공업은 삼성정밀화학과 2차전지 양극재 합작법인인 STM을 설립하고 지난해 9월부터 삼성SDI 울산 사업장 인근에 생산 라인을 구축 중이다.


문보경기자 okmu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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