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정보책임자(CIO)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혁신 과정에서 경영진을 설득하고 직원들의 IT 이해도를 높이는 일입니다. 전통적이고 오래된 CIO의 역할 중 하나지만 변함없이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한국전력이 글로벌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데 일조하기 위해 제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박진 한국전력(KEPCO) ICT기획처장은 조직 규모가 크면 클수록 정보기술(IT) 의존도도 높아지고 적용에 따른 효과도 크다고 말했다. 이런 조직에서는 어느 수준까지 IT를 접목할지 정해야 하고, 이를 추진할 때 경영진과 직원들의 IT적 인식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렇지 않은 조직에서는 아무리 투자를 늘려도 혁신은 요원하다 게 박 처장의 신념이다.
박 처장이 처음 CIO 임무를 수행했던 환경부에서 2년간 가장 공을 들였던 부분 역시 IT투자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곳곳에 산재한 정보시스템을 통합해 종합시스템으로 만드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첫 임무였다.
적잖은 예산이 필요한 사업이었다. 의견을 수렴하고 내부 승인을 거쳐 타당성조사를 받기까지 반년이 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결국 3년간 430억원의 예산을 환경종합정보시스템 구축에 투자할 수 있도록 승인받았다. 지금 돌이켜봐도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다고 박 처장은 회고했다.
두 번째 CIO를 맡았던 한국관광공사에서는 그나마 이런 일들이 수월했다. 공사에 필요한 정보화사업에 맞춰 전략적으로 CIO를 발탁했기 때문이다. 2005년부터 3년간 전사자원관리(ERP)시스템 구축, 홈페이지 통합, 온라인 마케팅시스템을 통한 대외 홍보 활성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한전은 지금까지 그가 근무했던 조직과는 많이 달랐다. 2만명이 근무하는 거대기업일 뿐더러 오랜 기간 굳어진 한전 특유의 보수적인 문화로 인해 변화를 받아들이기 쉬운 조직이 아니었다. 그래서 재작년 말 한전 CIO로 부임하면서 박 처장이 가장 먼저 한 일도 조직문화 변화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한전은 거대기업인 만큼 변화가 쉽지 않지만 이를 잘 극복한다면 혁신의 효과는 더 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 해 5000억원에 이르는 정보화예산의 투자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우선 정보화 추진 방향을 제대로 설정해야 했다.
박 처장은 그동안 CIO로 일한 경험과 여러 글로벌 전력회사 사례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혁신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그가 내린 결론은 `시스템경영`으로만 조직과 기업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스템경영은 업무 프로세스를 체계화하고 축적된 노하우를 시스템에 녹여내 경영에 접목하는 방식이다. 박 처장은 사람과 프로세스, 제도의 지속적 혁신을 통해서만 한전이 글로벌 톱5 수준의 전력회사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9개월에 걸쳐 전사 프로세스혁신(PI)과 IT 프로젝트를 위한 로드맵을 수립했다.
그가 세운 로드맵은 올해 초까지 PI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본사가 나주로 이전하는 2014년 전까지 차세대시스템 구축을 마무리짓는 게 골자다. 이를 위해 다수 과제를 종합적으로 분석·해결하는 빅뱅(일괄구축) 방식 PI와 정보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경영진에 과감히 제안했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 한전 신임 사장 선임 작업이 시작되면서 그가 준비한 혁신사업도 궤도를 수정해야 했다. 새로운 경영체계에서는 기존에 논의해온 전략과 로드맵이 재검토되게 마련이다. 결국 빅뱅 방식의 프로세스 혁신은 방향을 선회, 단계별 방식으로 분할해 추진하기로 했다.
박 처장은 “그 사이 다른 기업이 PI로 눈에 띄게 달라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깝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시스템경영`이라는 명칭 하에 한꺼번에 추진하려던 것을 업무별로 나뉘어 추진하기 때문에 그만큼 리스크도 줄이고 각 분야에 집중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 ICT기획처가 추진하는 사업은 사업종합관리시스템 구축과 홈페이지 구축, 내부 포털시스템 개선 및 첨단 IT설비 진단시스템 도입 등이다. 부서와 지방사업소별로 나눠 운영되던 50여개 홈페이지를 7월부터 하나로 통합한다. 복잡한 내부 포털시스템도 개선한다.
이달 15일에는 공공기관 최초로 모바일오피스를 오픈한다. 그동안 국정원 규제로 어려웠지만 한전이 최초로 허가를 받아 일부 업무에 시범적용한다. 단순히 내부 메일 확인뿐만 아니라 외부 근로자들의 설비진단에도 활용하게끔 했다. 설비진단요원이 모바일기기를 활용해 진단정보를 현장에서 보고할 수 있게 된다.
정보화 프로젝트 못지않게 박 처장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내부 직원의 역량 강화다. 지난해 ICT기획처와 운영센터, 전력연구원SW센터가 역량성숙도모델통합(CMMI) 레벨2 인증을 받으면서 소프트웨어 개발과 서비스 절차를 새롭게 정립했다. 인증 획득 이후 모든 프로젝트를 새로운 체계 하에서 수행하고 있다.
교육에도 힘을 쏟고 있다. 시장 동향과 안목 배양을 위해 각종 교육과 세미나를 지난해에만 50회 실시했다. 올해는 일주일에 1~2회씩 진행하고 있다. 한전이 발주자로서 기획·관리·검수를 하기 때문에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사용자 인터페이스, 데이터베이스 교육을 가장 중요한 분야로 선정했다.
박 처장은 “각 분야 최고 전문가를 강사진으로 구성해 겉핥기식이 아닌 심도 있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며 “세 분야 교육이 종료되면 네트워크 교육을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체 과정이 끝나면 한전에 필요한 내용만 추려내 내부 인재개발원에서 정규 교육과목으로 채택하도록 할 계획이다.
박 처장은 “한전이 해외로 진출하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선진화된 정보시스템과 관리 노하우가 필요하다”며 “해외 시장으로 나가기 위한 테스트베드는 결국 한전 내부며 이런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게 한전 CIO로서 나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박진 한국전력 ICT추진처장 약력
1988년 미국 디지털이퀴프먼트에서 프로그래머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1993년 삼성그룹 해외인력 특별채용 프로그램 때 삼성SDS에 입사해 시스템 아키텍트, 프로젝트 매니저, 컨설턴트 등을 맡았다. 2003년 환경부 정보화담당관을 거쳐 2005년부터 3년간 한국관광공사 CIO를 역임했다. 2010년 말 한전 ICT기획처장으로 발탁됐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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