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제조업체와 서비스업체가 충돌했다. KT가 전격적으로 스마트TV 인터넷 접속 제한 방침을 밝히자 업계는 `망 중립성`이라는 시한폭탄이 터졌다는 반응이다. KT는 망 중립성과 무관한 망 무단사용에 대한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모든 문제는 망 중립성으로 귀결됐다. 스마트미디어 시대를 맞아 망 중립성 세부 규칙을 조속히 수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균형잡힌 정보통신기술(ICT) 생태계 발전을 위한 보완 조치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무임승차` vs `서비스 혁신`= 논란 핵심은 `프리라이딩(FreeRiding)`, 즉 무임승차 여부다. KT는 스마트TV 제조사가 무단으로 자사 통신망을 이용하며 과도한 트래픽을 유발하는 만큼 망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제조사는 일반 이용자들이 스마트TV를 통해 새로운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이들은 이미 인터넷 가입자기 때문에 무임승차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양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상황에서도 KT가 접속 제한이라는 초강수를 취한 것은 망 중립성 공방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됐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해 말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을 수립했지만 스마트TV를 비롯한 세부 서비스에 관한 규칙 수립은 올해 진행될 예정이다.
프리미엄 서비스 도입 수순이라는 관측도 제기됐다. 스마트TV 등 일반 인터넷과 다른 유형의 대용량 트래픽을 유발하는 가입자에게는 가격을 높이되 안정적인 고품질을 보장하는 프리미엄서비스를 적용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국내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은 통신사가 기존 서비스 품질을 떨어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프리미엄급 관리형(managed)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KT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상대적으로 많은 트래픽을 수반하는 스마트TV 이용자에게 프리미엄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해왔다. 제조업계 관계자는 “KT가 인터넷요금 인상이나 서비스 종량제 문제를 풀기 위해 TV제조사를 건드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망 중립성` 훼손했나=KT가 10일 아침 실제로 삼성전자 스마트TV 인터넷 접속 제한을 단행하면 망 중립성 가치 훼손 여부를 놓고 2차 논란이 불붙을 전망이다. 통신사와 콘텐츠, 제조사 모두 차별없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망 중립성 대원칙에는 동의했기 때문이다.
KT는 스마트TV가 인터넷망을 무단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서비스를 차별해선 안된다`는 망 중립성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스마트TV 서비스가 전기통신사업법 제79조 제1항(…전기통신의 소통을 방해하는 행위를 해서는 아니된다)에 위배된다는 설명이다. 방통위가 접속 차단시 법 위반 여부조사에 나서겠다고 경고했지만 KT는 이를 근거로 망 차단을 강행할 방침이다. 사전 법률 검토 결과 문제될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KT는 다른 인터넷 서비스 이용에는 불편이 없도록 삼성전자 스마트TV용 서비스 서버로 향하는 길목만 차단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법적 판단은 유보했다. 방통위 망 중립성 정책자문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 전문가는 “현 상황만을 놓고 위법 여부를 논하기는 어렵다”며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는 이용자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반대의사를 밝혔다. 경실련은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에 위배될뿐 아니라 전기통신사업법을 위반해 이용자 이익을 저해하는 위법 행위”라는 주장을 담은 긴급성명을 내놓고 차단 철회를 요구했다.
◇제도화 작업 서둘러야=방통위는 올해 트래픽 관리 등 망 중립성 세부 규칙을 마련할 계획이었지만 예상보다 빨리 사업자간 충돌이 빚어졌다. 결국 선제적인 법제화만이 분쟁 해결을 막을 수 있는 방법으로 꼽힌다.
올 초 방송가를 뜨겁게 달궜던 지상파 재송신 분쟁도 명확한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망 중립성 역시 자율 협의와 타율 규제영역을 명확히 정리해 원칙을 마련해야 한다. 사업자간 소모적인 논쟁을 거듭하면 케이블TV방송사가 지상파 재송신을 중단했던 것처럼 통신사업자가 새로운 서비스를 차단하는 사태가 반복될 수 있다. 스마트TV뿐 아니라 `카카오톡` `마이피플` 같은 모바일메신저와 모바일인터넷전화(mVoIP)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날 공산이 크다.
법제화 과정은 산업 발전과 이용자 보호 두 부분을 함께 담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KT 결정이 옳고그름을 떠나 이번 조치로 인해 국내 스마트TV 산업은 위축이 불가피하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TV는 우리 기업이 글로벌 1, 2위를 차지하는 대표 품목”이라며 “삼성·LG TV 판매의 5%정도만 국내에서 이뤄지고 나머지는 수출 품목인데 제조사가 국내에서 부담을 안게 된다면 다른 수출 국가에서도 모두 유사한 비용을 내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용자 역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최초 스마트TV 구매시에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문제가 발생했다. 제조사가 트래픽 비용을 떠안으면 다시 제품가격에 반영돼 소비자에게 전가될 가능성도 있다. 통신사가 이용자에게 부과해야 할 대금을 제조·판매사에게 걷어달라는 속셈이라는 게 제조사 측 주장이다.
ICT 생태계 발전도 중요한 가치다. 통신사업자는 망 서비스로 수익을 얻고, 하드웨어업체는 망을 이용하는 단말기를 생산한다. 콘텐츠업체는 단말기에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공급해 사업을 영위한다. 이용자는 이들 세 가지 요소에 적절한 비용을 지불해 편익을 얻는다. 어느 한쪽만 강조되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 ICT 생태계다.
홍대식 서강대 교수는 “시장경쟁, 소비자 후생, 서비스혁신과 다양화, 투자유인 보호 등 여러 가치를 고르게 반영해 망 중립성 정책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