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화수목금금금’ 이대론 안된다
국내 대기업 계열 IT서비스 회사에 다니는 입사 6년차 김윤희 씨. 3년 전 그룹 내 금융 계열사 시스템관리(SM) 부문으로 발령받은 후 ‘월화수목금금금’이 일상이 됐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야근을 하고 토요일과 일요일도 출근을 한다.
얼마 전 새로운 업무 시스템을 개통할 때는 2~3일 연속 철야근무를 했다. 왕복 출퇴근에 두 시간 남짓 걸리지만 회사 근처에 원룸을 따로 얻어 생활하고 있다. 김 씨는 “거의 매일 철야 근무를 하다시피 하니 집에서 단 한 시간이라도 편히 자고 싶어 회사 근처로 이사했다”며 “어쩌다 쉬는 날이 생기면 잠자는데 바빠 친구 만난 지도 오래됐다”고 말했다.
모 기업의 IT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입사 3년차 한명수 사원은 얼마 전 씁쓸한 경험을 했다. 일요일에 출근해 일하던 중 근무처로 직장 선배의 부인이 들이닥쳐 ‘내 남편 여기 있는 것 맞냐’며 소란을 피운 것. 발주처가 제시한 시스템 구축 납기일이 워낙 빠듯해 수개월간 야근과 주말 출근을 해왔는데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하는 남편을 바람피운다고 오해한 것이다.
한 씨는 “만날 야근하고 주말 철야근무까지 밥 먹듯 하는데 오해받을 만도 하다”며 “업무 강도가 높고 쉬는 날도 마땅히 없다 보니 같은 회사 선배들 중에는 이혼한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숨을 쉬었다.
지난 2009년 11월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한 이후 한국 IT 시장은 연일 ‘SW 경쟁력’ ‘SW 인재 확보’ 등 SW 산업 강화가 이슈였다. 지난 2년간 정부는 SW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책 마련에 분주했고 이에 업계는 SW 개발자에 대한 인식 확대와 업무 환경 개선 효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실제 업무 현장에서는 지난 2년간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국내 SW 개발자들이 체감하는 변화는 극히 미미하다. 여전히 과중한 노동 강도, 창의력 향상을 위한 교육 기회 박탈, 자기계발 시간 부족 등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 발주 기업들은 납기 마감일을 빠듯하게 설정하고 사무실에 앉아있는 개발자의 머릿수 위주로 참여도를 평가하는 등 여전히 비효율과 낮은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다.
IT서비스 기업 한 관계자는 “정부가 SW 산업 육성책을 마련해왔지만 실질적으로 개발자가 느끼는 업무 환경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며 “국내 SW 시장의 뿌리부터 재정립하고 개발 업무 특성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개발자들이 잠재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SW 개발자=프로그램 짜는 기계?’= IT서비스 기업에 입사한지 2년째 된 이민규 사원. 이 씨는 요새 부서를 이동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주변 지인들과 인터넷을 통해 이직도 알아보고 있다. 자격증, 어학연수, 토익점수 등을 준비하며 힘들게 취직했는데 업무 강도가 너무 높아 회사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이 씨는 “프로젝트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부여하고 색다른 IT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등 역동적인 회사 생활을 꿈꿨는데 현실은 과로와 피로감으로 주어진 일만 간신히 소화하는 기계적인 개발자가 돼 있었다”며 “입사 5년차 정도 되면 매너리즘에 쉽게 빠진다고들 하는데 고작 2년 만에 한계에 봉착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각 회사별, 업무별 정도는 다르지만 개발 업무에 대한 낮은 인식과 배려, 높은 업무 강도는 공통적인 해결 과제다. 오래전부터 관련 기업들은 일주일 중 하루를 ‘패밀리 데이’로 삼고 정시 퇴근을 권장하는 문화를 조성해왔으나 실제 업무 환경에서는 조삼모사식 배려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SW는 무형의 자산과 서비스다. 기획자의 아이디어, 수요자의 요구사항에 따라 변화 폭이 크다. 시스템 환경에 따라 수많은 돌발변수에 대비해야 하는 준비기간도 상당하다. 시스템 개통 후 수 개월간 안정화 작업을 거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새로운 시스템 구축을 원하는 발주처들 중 이 같은 SW 산업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업무 환경을 배려하는 곳은 아직 드물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결과물의 효율성이 아니라 개발자가 몇 명 참여했는지 머릿수 기준으로 대가를 산정하는 맨먼스 방식 적용 비중은 줄었지만 업무 특성을 반영하지 않고 납기일을 무리하게 단축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시스템을 탄탄히 구축하지 않으면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 이를 수정·보완하는데 시간과 인력이 더 필요하게 된다”며 “단시간 내에 수준 높은 시스템 구축을 원하면서 추가적인 요구사항까지 모두 반영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수요 기업들의 인식 개선이 필수”라고 말했다.
◇창의성 교육은 ‘그림의 떡’= 휴일이 따로 없는 과중한 업무 강도는 SW 개발자를 시들어가게 만든다. 자기계발을 위한 취미활동이나 공부를 할 여유를 앗아가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실시하는 직원 의무교육도 프로젝트 기간 중에는 그림의 떡이다. 외부 기업의 시스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에는 해당 발주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단기 프로젝트는 괜찮지만 1~2년간 진행하는 장기 프로젝트의 경우 해당 기간 동안 기업 의무 교육도 못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해당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인재 발전 가능성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직원 교육 예산을 적게 편성하거나 경영난을 이유로 줄여버리는 SW 기업들도 문제다. 직무 교육, 창의성 교육 등은 연간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에 이르지만 당장 실적으로 이어지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예산 축소대상 1순위다.
교육과 업무 현장이 분리된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창의 교육을 받고 온 직원이 이를 업무 현장에 적용해볼 수 있어야 하는데 교육 후에는 다시 ‘프로그램 만드는 기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개인이 생각하고 연구할 시간적 여유, 이를 수용하는 조직과 업무 문화 모두 받쳐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 SW 개발자는 “각 분야 SW 개발자 개개인의 역량은 뛰어나지만 여러 한계 상황 때문에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경우가 많다”며 “창의성과 업무능력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장치와 환경이 뒷받침돼야 SW 산업 발전도 이루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표1. 소프트웨어 구인 인원 및 미충원율
※자료: 고용노동부, 조사통계. 삼성경제연구소
표2. 소프트웨어 산업 경쟁력(2007년)
※자료: 삼성경제연구소
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