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9988` 중소벤처

 2000년 여름께로 기억한다. 우리나라 BT연구의 산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잔디밭에서 벤처기업을 위한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크게 알리지도 않았건만, 정부출연연 연구원과 벤처기업인, 벤처투자에 관심 있는 엔젤 등 300여명이 순식간에 모인 것이다. 서로 만나 네트워킹하고, 벤처 생태계를 구축해보자는 첫 시도였다.

 이때만해도 벤처투자가 붐을 이뤄 기업 한 두 곳쯤 투자해 놓지 않으면, 마치 세상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았다. 정부 지원도 어마어마했다. 정부 경제정책도 중소벤처가 우선시 됐다.

 네트워킹의 결실은 ‘벤처 아고라’로 맺어졌다. KAIST내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지하 1층에 엔젤 5~6명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밥도 먹고, 정보도 교류할 수 있는 ‘벤처 아고라’를 만들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아고라는 1~2년 운영하다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돌이켜보면 정부출연연구기관 건물에 일반 식당을 허가한 것 자체도 논란거리였다. 그러나 아고라 오픈식이 있던 날, 주목받지 못했지만 자리 한 켠을 지킨 인물들이 있었다. 바로 AP시스템의 창업주 류장수 회장이다. 당시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선임부장 자격으로 이날 행사에 참가했었다. AP시스템은 현재 국내 최고 반도체 디스플레이 장비업체로 자리를 굳혔다.

 최근 코스닥에 입성한 이중환 케이맥 사장도 그 자리에 있었다. 1996년 창업한 이 회사는 15년간 물성 분석이라는 외길을 걸어왔다. 최근엔 u-헬스 등 바이오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2000년 5월 창업한 골프존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코스닥 시장서 시가총액만 6800억원에 이른다. 매년 영업이익률이 30%를 훌떡 넘는 ‘벤처 블루칩’이 됐다.

 이 자리에 CEO는 있었지만, 기업은 사라지고 없는 경우도 많다. 코스닥까지 올랐던 블루코드테크놀러지와 인바이오넷, 해빛정보, 하이퍼정보통신 등이 M&A 됐거나 문을 닫았다. 이들은 모두 벤처 1세대였다.

 뒤돌아보면 ‘벤처 아고라’는 엔젤 투자자와 연구원, 벤처 사업가에게 새로운 도전과 성공을 만들어내는 ‘창업공장’ 같은 역할을 했다.

 중소기업청이 올해만 129개 기업 육성책에 5조9700억원을 쏟아 붓는다. 내년엔 예산이 더 늘어난다. 매년 기업지원 예산은 늘어날지 몰라도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 벤처기업들의 하소연이다.

 우리나라 중소벤처를 두고 ‘9988’이라고 부르는 말이 있다. 99.9%가 중소기업이고, 국내 노동자의 88%가 중소기업에서 근무한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추락하는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중소기업 CEO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벤처 붐은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IMF 이후 위기극복 수단이 됐다. 국제금융위기로 경기가 하락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제2의 벤처붐을 만들 좋은 기회다.

 


대전=박희범기자 hb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