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이 시행됐다.
또 내년에는 한미 FTA가 시행될 가능성도 높다. 한·EU와 한미 FTA는 앞서 시행된 한·아세안, 한·칠레, 한·인도 무역협정보다 대상지역과 범위가 포괄적이어서 그 여파가 크다. 특히 FTA 시행으로 관세혜택을 받아 수출이 크게 확대될 수 있다.
단, 조건이 있다. 바로 한국산이라는 원산지 증명이 가능해야 한다. 현대·기아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 등 수출기업은 물론이고 이들에게 부품을 공급하는 협력업체들까지도 당장 원산지 증명체계를 갖춰야 한다. 현재로서는 이들의 대응방안에 한계가 많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기업의 위기뿐만 아니라 국가 신임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난해 말부터 삼성전자, LG전자, 현대·기아자동차 등 대형 수출기업은 자체적으로 수십억원을 투입해 FTA 대응 원산지 증명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수출 비중이 높은 대기업과 수출기업에 부품을 공급하는 대형 1차 협력업체들은 대부분 원산지 증명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러나 문제는 중견·중소 협력업체들이다. 이들은 아직까지 이렇다 할 대응 방안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관세혜택 받는 데는 원산지 증명이 핵심=FTA 시행으로 상대국으로부터 관세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산 제품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따라서 원산지 판정이 관세혜택을 받는 데 핵심 사항이다.
원산지 판정 기준은 크게 세번변경 기준과 부가가치 기준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세번변경 기준은 원재료와 완제품의 국제통일상품분류체계(HS)코드가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 국산 제품 여부를 판정하는 방식이다. HS코드는 제품의 성격과 원산지 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수출한 휴대폰 HS코드와 제품 속에 들어있는 외산 부품 HS코드가 여섯 자리 이상 동일하면 부품을 그대로 가져다 가공없이 생산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산 제품이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반면에 HS코드가 두 자리나 네 자리만 동일하고 나머지가 다를 경우 국내에서 가공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한국산 제품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HS코드가 몇 자리부터 달라야 하는지는 협정마다 다르다.
부가가치 기준은 완제품 공장도 가격에서 국산 원재료 가격이 얼마를 차지하는지 평가하는 방식이다. 이 역시 협정마다 다르지만 한·EU FTA에서는 국산 원재료 가격이 60% 이상을 차지해야 한국산 제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현재 원산지 증명 판정 방식은 협정마다 다르지만 한·EU FTA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돼 있다. 그러나 일부 협정은 두 기준 모두 충족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세번변경 기준이나 부가가치 기준 모두 도입하는 원재료와 공급하는 제품이 많을 경우 계산하는 방식이 매우 복잡하다. 따라서 기업은 세번변경 기준이나 부가가치 기준 등의 데이터를 추출, 가공해 자동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원산지 증명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중견 협력업체 원산지 증명시스템 없어 문제=이미 한·EU FTA가 시행된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수출기업에 부품을 공급하는 중견·중소 협력업체들이 원산지 증명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수출업체는 협력업체에 수작업으로라도 원산지 증명확인서를 받을 수 있도록 구매 계약서에 명시해 놓고 있다. 또 향후 원산지 증명 오류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협력업체가 책임진다는 내용도 포함해 놓고 있다. 대형 수출기업은 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문제 해결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협력업체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원산지 증명확인서를 발급하고 있지만 대부분 수작업으로 계산한 것이다. 데이터 추출, 가공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오류가 발생한다. 심지어 물품 판매를 위한 인위적인 조작도 이뤄진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발급된 원산지 증명확인서를 기반으로 수출기업이 해당 제품에 원산지 증명을 했을 경우 향후 발생될 수 있는 위험요인은 매우 크다.
실제로 원산지 증명이 허위임이 밝혀지게 될 경우 먼저 해외 구매업체는 그동안 면제받은 모든 관세를 납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자까지 부담해야 한다. 이후 구매업체는 국내 수출업체에 해당 사항의 모든 책임을 묻게 된다. 이에 대해 수출업체가 협력업체에 책임을 떠넘긴다 하더라도 국제 신뢰도 하락은 불가피하다. 즉 수출에 직접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덤핑으로 법적 분쟁에도 휘말릴 수도 있다. 국내에서는 벌금과 함께 형사처벌도 받는다. 결국 협력업체의 잘못이 협력업체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셈이다.
또 다른 문제는 협력업체들이 원산지 증명시스템을 갖추지 않았을 경우 향후 해당 국가에서 원산지 증명 실사가 직접 나왔을 때 이에 대응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한·EU FTA에는 통관 액수 기준으로 전체 중 0.5%의 제품을 반드시 사후조사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특히 시장 지배력이 갑작스럽게 커질 경우 사후 실사를 할 수 있다. 이때 실사는 원산지 비율이 얼마인지보다는 어떠한 데이터에 의해 원산지 증명을 했는지 중점적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자체적으로 원산지 증명시스템을 갖춰 데이터 관리를 하지 않으면 이를 입증하기 어렵다.
◇정부·대기업, 협력업체 지원 노력 효과 없어=중견·중소 협력업체의 원산지 증명 시스템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와 대기업도 일부 노력은 하고 있다. 그러나 중견·중소기업에 실제적인 효과를 주기에는 한계가 많다.
관세청은 ‘FTA-패스’라는 공용 원산지 증명시스템을 구축해 중견·중소기업이 활용할 수 있도록 웹 및 애플리케이션 기반으로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아주 단순한 부품을 생산, 공급하는 중소기업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기업이 이용하는 데 한계가 많다. 무엇보다 FTA-패스에 데이터를 입력해 원산지 증명 판정을 받아야 하는데 여기에 입력하는 데이터 가공이 쉽지 않다. 결국 원산지 증명을 받기 위해 가장 중요한 데이터 가공은 중견기업이 직접 해야 하는 형태다.
현대자동차가 중견·중소 협력업체에게 무상으로 제공한 원산지 증명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현대자동차는 최근 에코클라우드의 ‘인사이트’라는 원산지 증명시스템을 구매해 협력업체에 제공했다. 현재 400여곳의 현대자동차 협력업체 중 350곳이 원산지 증명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다 이 시스템은 데이터를 자체적으로 추출, 가공해야 하기 때문에 협력업체가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협력업체 대부분은 이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한 협력업체 관계자는 “IT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다 전사자원관리(ERP)시스템에서 데이터를 추출해 이를 다시 가공하는 일은 중견업체가 하기 쉽지 않다”면서 “내부 ERP 시스템과 제공받는 원산지 증명 시스템이 연동되지 않는 한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협력업체들이 수출기업이 받는 관세혜택 효과를 공유할 수 없는 것도 원산지 증명시스템을 갖추는 데 소극적인 이유로 꼽힌다. 또 다른 협력업체 관계자는 “수출기업은 관세혜택으로 제품경쟁력이 높아져 수출이 확대된다고 하지만 협력업체는 이로 인해 공급 단가가 높아지거나 별도의 경쟁력을 갖게 해주는 효과는 전혀 없다”고 토로했다. 결국 협력업체에는 비용이 발생되는 대기업의 요구 사항 정도로만 인식될 수밖에 없다.
<표>기업들 원산지 증명시스템 구축 추진 현황
자료 : 각사 종합
<표>원산지 판정 방식
<표>인증 수출자의 협정별 혜택
자료 : 관세청
신혜권기자 hk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