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13> 통신시장 대전의 서막 “빗장은 풀고 경쟁은 공정하게”

“맴맴맴.”

삼복(三伏) 더위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자 청와대 경내 녹음이 우거진 녹지원에서 매미가 자지러지듯 목청을 높였다. 한여름 폭염의 앙탈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법이다.

초복(初伏)이 이틀 지난 1995년 7월 20일 오전 9시 청와대 본관 2층 집현실.

김영삼 대통령 주재로 경제확대장관회의가 열렸다. 홍재형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현 국회부의장)과 경제부처 장관, 한이헌 청와대 경제수석(15대 국회의원, 기술보증기금 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어고 교장) 등 15명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서 홍 부총리는 `신경제 장기구상 작업계획`을 보고했다. 이어 경제부처 장관들은 차례대로 주요 업무를 요점만 보고했다.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은 이날 `통신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본방향`에 대해 보고했다. 이 보고는 통신 시장의 전면 개방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통신 시장 개방의 완결판으로 국내 재계의 판도를 바꿔놓을 수 있는 메가톤급 정책이었다. 통신 시장 대변혁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경 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업무 내용을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현장중계해 보자.

“정보통신부 장관입니다. 먼저 통신사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본방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경 장관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계속 말문을 이었다.

“첫째, 선국내경쟁 후국제경쟁`의 기조 아래 대외 경쟁에 앞서 국내 경쟁체제를 조기에 구축하겠습니다. 둘째, 기간통신망의 안정적 운영을 책임지는 주도적 사업자를 육성하겠습니다. 셋째, 통신사업자 간에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도록 하겠습니다.”

통신시장 개방정책의 골자였다.

“이런 기본 방향에 따라 올 하반기에 국제전화와 개인휴대통신(PCS) 등 7개 분야의 사업자를 신규로 허가하겠습니다. 1996년에는 시내전화를 제외한 모든 통신사업의 허가신청을 개방해 전면적인 국내 경쟁체제를 구축해 나가겠습니다. 아울러 세계무역기구(WTO) 협상 결과에 따라 단계적으로 국제 경쟁을 확대해 나가겠습니다. 또 주도적 통신사업자로서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도록 무선사업 등 사업 영역 확대를 허용하는 동시에 통신공사의 경영 혁신 방안을 조기에 강구해 시행토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통신사업자 간 공정한 경쟁이 조성되도록 사업 간 회계분리, 내부 보조금지, 공정한 상호접속 보장 등 공정경쟁을 위한 관련 규정과 절차를 개선하고 통신위원회 기능을 강화해 나가겠습니다. 이런 정책방향에 대해서는 공청회 등 충분한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 세부 추진계획을 확정해 보고 드리겠습니다.”

부분적으로 풀었던 국내 통신 시장의 모든 빗장을 몽땅 열겠다는 보고였다.

김 대통령은 이런 보고가 끝나자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할 뿐 특별한 지시를 하지 않았다. 이미 김 대통령은 1월 6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세계화를 국정목표로 제시한 상태였다. 세계화를 한다면서 통신 시장 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경 장관도 1월 9일 대통령에 대한 새해 첫 업무보고에서 “경쟁력 확보를 위해 통신사업자는 늘리고 규제는 풀어 통신 시장에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고 보고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인지 김 대통령은 이 문제에 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한이헌 경제수석의 말.

“김 대통령은 어떤 정책이건 큰 방향이나 원칙만 정해주고 세부사항은 해당 부처 장관에게 맡기는 업무 스타일입니다. 작은 일까지 시시콜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경 장관의 증언도 이와 일치했다.

“사전에 경제수석을 통해 기본방향에 관해 보고를 받아서 그런지 대통령께서는 `알았다`고만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별도의 지시는 없었어요.”

이 같은 통신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본 정책방향은 체신부 시절부터 추진해 온 통신 시장 개방 정책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다. 체신부 시절인 1990년 1차 통신사업 구조 개편을 단행했고, 1994년 6월 2차 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따라서 1, 2차 통신사업 구조 개편이 예령(豫令)에 해당했다면 이번에 발표한 정책 기본방향은 동령(動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이 모두에게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기존 사업자들로서는 달갑지 않은 점도 있었다. 시장에서 독점이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는 격이 아닌가.

경 장관의 회고.

“이런 통신 시장의 완전 개방 방침에 대해 일부 이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지나고 보니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책 방향은 경 장관이 경제장관확대회의에 보고하기 보름 전에 정보통신부가 언론을 통해 발표한 내용이다.

정보통신부는 통신산업의 세계화와 국가 기간통신망의 안정, 그리고 WTO 기본통신협상에 따른 시장 개방에 대비하기 위해 이 같은 정책을 마련했다.

이 작업과 관련해 경 장관의 증언.

“저는 통신 시장 진출에 제한을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고 능력 있는 기업이면 누구나 통신사업에 진출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사업허가 신청에서 정부가 사전에 공고하는 방식을 없애도록 했습니다. 새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이 통신사업에 참여를 희망할 경우 과거와 달리 정부의 사전공고 없이 사업허가를 신청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기본정책 입안의 핵심 역할은 정홍식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LG데이콤 부회장 역임)이 맡았다.

정 실장의 회고록 증언.

“2000년 이후 우리나라 통신사업의 완전한 국제 경쟁과 개방에 앞서 1998년까지 먼저 국내 경쟁체제를 도입하되, 한국통신을 우리나라의 주도적 사업자로 육성한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또 2000년까지는 한국통신을 비롯한 3개 정도의 `종합통신사업자`를 육성할 수 있도록 사업자 간의 M&A 허용, 외국인 지분 확대 등도 검토해 추진키로 했습니다. 저는 정부가 행정 편의주의에서 벗어나 국민과 기업의 시각에서 모든 행정규제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이 정책 입안의 라인은 정 실장과 강상훈 정책심의관(청와대 정보통신비서관. 정보통신연구진흥원장 역임), 이성옥 정책총괄과장(정보통신연구진흥원장 역임. 현 한국정보산업협회 부회장), 김대희 사무관(현 방송통신위원회 기획조정실장) 등이었다. 여기에 통신개발연구원(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연구진이 가세했다. 이 연구는 최선규 규제정책연구팀장(현 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이 주도했다.

정책 실무를 담당했던 이성옥 정책총괄과장의 말.

“당시 경 장관은 `능력 있는 기업을 통신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관의 의지를 정 실장이 정책에 반영한 것입니다. 가능한 한 빨리 모든 통신사업에 경쟁체제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입안한 것입니다. 당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일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마련한 방안은 1995년 6월 29일 경 장관의 최종 결재를 받았다. 하지만 언론 발표는 공보관실의 준비 등으로 인해 그해 7월 4일 오전에 했다.

그날 오전. 정보통신부 기자실.

단정한 모습으로 감색 양복 차림의 경상현 장관이 기자실로 들어섰다. 출입기자들과 인사를 나눈 경 장관은 사전 예고한 통신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본 정책방향을 발표했다.

담당 국장인 강 정책심의관이 정책 내용을 설명하고 이어 경장관이 기자들과 일문일답 시간을 가졌다. 이날 발표한 정책에 대한 기자들의 관심은 대단히 높았다. 기자들 못지않게 통신사업에 참여하려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정책 내용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통신정책을 다루는 정보통신부의 일거수 일투족은 재계의 주목 대상이었다.

서영길 공보관(티유미디어 사장 역임, 현 세계경영연구원 연구소장)의 기억.

“당시 이 정책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취재 열기가 높았던 것은 분명했습니다.”

경 장관은 기자들과 일문일답에서도 통신 시장은 시장 기능에 맡겨야 한다는 소신을 거듭 밝혔다.(기자들과의 일문일답 내용 중 일부)

-모든 통신사업에 경쟁체제를 도입하면 통신사업자가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이제 통신사업도 시장 기능에 맡겨야 한다. 사업 수나 수익성 여부는 사업자에게 맡겨야 한다. 그들이 판단하고 책임질 문제다. 정부는 엄정한 경쟁 기반을 갖추도록 최선을 다할 방침이다.

-지난해 2차 통신사업 구조 개편에 이어 3차 개편을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각국의 통신 시장 변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도 통신 시장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정책방향을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신요금에 대한 규제는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

▲통신요금에 대해서는 1차로 정부 규제를 완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시장 기능에 맡긴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정보통신부가 발표한 기본 정책방향의 핵심은 앞서 언급한 대로 통신사업 경쟁체제의 조기 구축과 한국통신의 경쟁력 제고, 통신사업자 간 공정경쟁제도 확립의 세 가지였다.

정보통신부가 통신 시장을 전면 개방키로 정책을 정함에 따라 재벌들의 통신사업권 쟁탈전은 삼복 더위도 아랑곳없이 차츰 달아올랐다. 이른바 통신대전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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