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1월 19일.
김영삼 대통령은 이날 오후 9박 10일간의 아·태 순방 및 아태경제협력기구(APEC) 정상회담 참석을 마치고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김 대통령은 귀국 전에 호주 시드니에서 앞으로 국정목표를 세계화에 두겠다는 이른바 ‘세계화 장기구상’을 전격 발표했다. 국내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김 대통령은 귀국 즉시 박관용 비서실장으로부터 ‘전방위 보고’를 받았다. 김 대통령은 박 실장에게 ‘세계화 구상’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날 상황을 박 실장의 기억을 토대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번에 해외에 나가서 많이 배워 왔어요. 클린턴 미국 대통령도 세계화를 말하더구먼.”
“그런데 각하, 지금 정부조직으로는 세계화를 추진하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세계화 구상에 적합한 정부조직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김 대통령이 박 실장을 향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김 대통령은 당시 정부조직 개편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대통령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 실장이 아닌가. 그런데 왜 다시 조직개편을 거론하느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박 실장은 자꾸 정부조직을 개편하자고 하던데 뭘 어떻게 개편하자는 말이오? 무슨 복안이라도 있습니까?”
박 실장은 순간 대통령의 심경에 변화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자신있게 말했다.
“예. 제가 다 준비해 놓은 안이 있습니다”
“준비를 해 놓다니? 무엇을 다 준비를 했다는 거요”
“각하. 정부조직을 획기적으로 개편하지 않으면 세계화 구상을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극비리에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어디 그 안을 좀 봅시다.”
박 실장은 김 대통령에게 철통보안 속에 만든 정부 조직개편안의 골격을 간략히 보고했다.
김 대통령은 박 실장이 보고한 정부조직개편안을 들고 관저로 퇴근했다.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 대통령은 작은 일까지 시시콜콜 챙기는 업무 스타일이 아니었다. 대범해 원칙만 정해 주고 나머지는 실무자에게 일을 맡겼다. 이랬던 김 대통령이 평소답지 않게 정부조직개편안을 가지고 관저로 퇴근하는 것이었다.
박 실장의 회고.
“대통령이 틀림없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듣기 위해 서류를 가지고 퇴근했는데 누구한테 보였는지 아직도 모릅니다.”
그로부터 1, 2일 후.
김 대통령이 박 실장을 불러 개편안을 넘겨 주며 말했다.
“박 실장이 만든 안대로 정부조직을 개편합시다.”
“알겠습니다. 그 절차와 형식은 제가 별도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이날 상황에 대한 박 실장의 회고.
“얼마나 반갑고 기쁜지 뭐라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이 청와대 비서실장 재임 시 가장 보람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상 최대의 정부조직 개편안이 사실상 확정됐다. 이 조직개편은 문민정부 세 번 째였다. 이 안에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개편하는 것이 들었다. 세 번 째 정부조직개편안은 박 실장의 작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시간을 그해 4월로 되돌려 보자.
4월 22일 오후.
황영하 총무처 장관은 이날 오후 김 대통령에게 정부조직개편안에 대해 최종 재가를 받기로 했다. 청와대 비서실에 면담 신청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황 장관의 회고.
“청와대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일이 터진 것입니다. 4시가 조금 지나 이회창 총리가 사표를 낸 것입니다. 국무총리가 사표를 냈는데 정부조직을 어떻게 개편합니까. 그 후 7월에 김일성 주석의 사망 등 현안이 발생한 데다 각 부처의 반발 등으로 모든 게 정지됐습니다.”
김 대통령이나 이 총리는 둘 다 강한 성격의 소유자다. 이 총리는 대법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감사원장을 거쳐 1993년 12월 국무총리로 발탁됐다. 그는 감사원장 시절 이른바 성역으로 통하던 청와대 비서실과 국방사업 등에 대한 감사를 해 성역을 허물었다. 그로 인해 ‘대쪽’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가 총리 권한을 놓고 김 대통령과 충돌한 것이다. 그는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며 127일만에 사표를 냈다. 다른 소식통은 김 대통령이 이 총리를 경질했다고 한다. 그 날 두 사람은 고성을 주고 받았다. 집무실 밖까지 소리가 새어 나왔다고 한다.
아무튼 정국이 소용돌이 치면서 정부조직개편안은 사실상 방기되다시피했다. 이 무렵 김 대통령도 정부조직개편에 따른 심적 부담이 컸다.
김 대통령은 2001년 펴낸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정부조직에 대해 나는 취임 초부터 대폭 수술을 생각해 왔다. 취임 직후인 1993년 4월 문화부와 체육청소년부를 통합해 문화체육부로, 상공부와 동력자원부를 통합해 상공자원부로 개편했다. 이 때만 해도 반발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 나서서 체육청소년부를 문화부와 통합하는데 반대했다. 자신이 체육부장관을 했었다는 이유로 공무원들의 기득권 옹호에 가담했다.”
박 실장의 말.
“1, 2차 조직개편 때 고생을 무척 했습니다. 로비나 압력으로 인해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각 부처마다 생존 논리를 개발해 설파하고 공직사회의 동요도 상당했어요.”
이 무렵 박 실장은 김 대통령에게 대폭 개편을 건의했다.
“이제는 종합적이고 혁명적인 정부 조직개편을 단행해야 합니다.”
김 대통령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말했다.
“아이구, 이제 정부조직개편은 이제 그만해야겠어요. 이것 때문에 다른 일을 하나도 못하겠어.”
가장 속이 탄 것은 대통령 자문기구로 발족한 행정쇄신자문위원회였다. 위원회가 이미 정부 조직개편안을 만들어 놨는데 김 대통령의 입장이 저러하니 행정쇄신위원회인들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고위공직자의 복지부동과 조직개편 반대 여론도 적지 않았다.
박 실장은 행정쇄신위원회로부터 개편안을 넘겨 받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대통령을 설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60∼70년대 개발시대의 정부조직은 개방화와 세계화 시대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박 실장은 자신이 주도해 개편안을 만들기로 마음 먹고 극비리에 비서실장 직속으로 실무팀을 만들었다.
계속되는 그의 회고.
“당시 비서실장 보좌관(기획조정비서관)으로 김광림 국장(재경부 차관 역임. 현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데려 왔어요. 그는 행정력과 기획력이 뛰어났어요. 김 비서관한테 정부조직개편안 작업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력을 차출하라고 지시했어요”
김 비서관을 중심으로 김종민 청와대 행정비서관(문화체육부 차관, 한국관광공사 사장, 문화체육부 장관 역임)과 김정국 경제비서관(재경경제원 1차관보 역임, 보고경제연구원 회장), 김동연 비서관(현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등으로 팀이 짜여졌다. 이의근 행정수석(경북지사 3선,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 역임. 작고)과 한이헌 경제수석(국회의원, 기술보증기금 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고교 교장) 등도 이 작업에 관여했다.
박 실장은 이런 사실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 올 것으로 판단했다.
박 실장의 설명.
“이들에게 철저한 보안을 강조했어요. 만약 외부로 이 사실이 새어 나가면 사표를 받겠다고 했어요. 사표를 미리 받았어요.”
작업은 보안 유지를 위해 주로 비서실장 공관에서 했다. 실장 공관 2층 작은 회의실에서 일에 따라 매일 또는 며칠에 한 번 씩 모였다.
매미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는 여름 쯤 개편안을 완성했다.
박 실장의 회고.
“정보통신부 확대 개편은 시대의 흐름이라고 확신했어요. 내가 그 분야를 잘 모르지만 다가올 정보화시대에 대비하려면 부처별로 나뉜 정보통신 관련 기능을 일원화해야 한다는 원칙은 분명했어요. 일부는 내가 윤동윤 장관과 친구라서 치우친 것 아니냐고 할 지 모르나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나나 윤 장관이나 일에 관해서는 원칙주의자입니다.”
개편 작업을 끝냈으나 김 대통령의 입장에 변화가 없었다. 박 실장은 대통령에게 말도 못하고 처지가 난감했다.
이런 가운데 김 대통령이 10월 12일 한국경제신문 창간 30주년 특별회견에서 “부처 간 통폐합은 현 시점에서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소식에 조직개편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각 부처는 환호했다. 이제 ‘조직개편은 물건너 갔다’며 안도하는 분위기로 변했다. 정부조직개편설은 더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
당장 행정쇄신위원들이 반발했다. 김광웅 위원(서울대행정대학원장, 중앙인사위원장 역임. 현 서울대 명예교수)은 이런 위원회라면 사퇴하겠다고 나섰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바로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김 대통령이 11월 아·태순방 중 깜짝 ‘세계화 구상’을 밝히고 박 실장이 과감한 정부조직개편을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이 신통력을 발휘한 셈이다. 그동안 반대입장이던 김 대통령이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박 실장은 박동서 위원장을 서울시청 앞 프라자 호텔로 조용히 불러냈다. 22층 스카이라운지 구석진 곳에 앉아 그간의 사정을 소상히 설명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합니다. 드디어 대통령의 승낙을 받았습니다.”
박 위원장이 깜짝 놀라며 반색을 했다.
“아이구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손질을 좀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박 위원장이 행정쇄신위원회가 만든 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해 확정하는 형식으로 처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박 실장은 박 위원장이나 위원들이 서운하지 않게 이해를 구했다.
“대통령 보고 일자는 제가 정해 연락 드리겠습니다”
11월 29일.
박 위원장은 김 대통령과 독대해 이 안을 확정지었다. 청와대는 대변인을 통해 박 위원장이 대통령에게 현안 업무를 보고했다고 발표했다. 언론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누구도 조직개편안이란 것을 짐작조차 못했다. 이날 청와대 발표는 1단 기사로 처리됐다.
박 실장은 황영하 총무처 장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청와대가 정부조직개편안을 넘겨주면서 성안 작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황 장관의 회고.
“조직개편 성안 작업은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습니다.”
이 작업에 총무처 문동후 조직국장(2002월드컵 사무총장 역임. 현 2011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조직위 사무총장)과 김영호 조직기획과 과장(충북 부지사, 행정안전부 제1차관 역임. 현 법무법인 세종 고문) 등이 참여했다.
김 과장의 말.
“장관의 지시를 받아 실무작업을 했습니다. 보안 유지를 위해 퇴근 후 올림피아, 뉴서울, 스위스그랜드 호텔 등을 돌았습니다. 낮에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호텔에서 일하느라 집에는 새벽에 들어가 옷만 갈아입고 나왔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씩 박관용 비서실장 공관으로 가 박실장 주재로 회의를 했습니다. 사무관 2명이 이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정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박 실장은 정부조직개편안 발표일을 12월 3일로 잡았다. 국회에서 그해 예산안 통과 시한이 2일이었던 것이다.
청와대는 발표할 정부조직개편안 자료도 3일 새벽에 인쇄했다.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보안을 유지했다.
1994년 12월 정부조직개편안은 박 실장이 적극 나서지 않았으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3차 조직개편은 박 실장의 ‘걸작’이고 그 안이 ‘신통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조직개편과 관련한 뒷이야기.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문민정부 고위 인사의 증언이다.
“당초 개편안에 총무처와 내무부도 폐지 부서에 포함됐습니다. 그런데 총무처는 최창윤 장관(청와대 정무수석, 공보처 장관, 김 대통령 후보 비서실장 역임)이 막판에 개입해 뒤집었고 내무부는 경찰청 때문에 그대로 놔주었습니다”
정부조직개편의 막전막후는 이처럼 드라마틱한 반전의 연속이었다.
IT칼럼니스트 hdlee@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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