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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과학기술 출연연 수장 중 가장 큰 화제를 뿌렸던 인물은 단연 한홍택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68)이다. KIST 최초 외국인 원장으로서 거침없는 개혁을 진두지휘하면서 과기계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스스로 원하는 자리에 지원하는 개방형 인사 시스템 도입부터 전 연구원이 한자리에 모여 KIST의 나아갈 방향을 공유하는 ‘타운홀 미팅’에 이르기까지 한 원장의 시도 하나하나가 새로움 그 자체로 다가왔다. 이 모든 노력이 지향하는 지점은 명확하다. 바로 KIST를 세계 최고의 연구소이자 과학기술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의 산실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8월 말 한 원장이 취임한 지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 KIST 연구원들에게 새로운 수장의 첫인상을 물었다. “좀처럼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학자”라는 게 대다수 의견이었다.

 새해를 며칠 앞두고 만난 KIST 임원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한 번 정한 바는 확고히 밀고 나가는 강한 신념의 소유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취임 후 4개월간 쉼 없이 KIST의 변화를 이끌어올 수 있었던 저력을 확인한 셈이다.

 한 원장은 취임사에서 과학기술인 정년 연장을 주장하며 ‘연구원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을 기치로 내걸었다. 수십년간 기초기술 출연연의 한계를 체감해온 KIST 연구원들은 처음에는 ‘과연 그럴까’라는 의구심을 가졌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장기간 축적해온 연구성과물과 노하우가 있는 만큼 마음만 먹으면 KIST가 세계 최고 연구소로 도약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원장은 연구원들의 달라진 인식을 비롯한 KIST의 숨겨져 있던 잠재력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말로 운을 뗐다. 

 -원장 취임 이후 4개월간 그야말로 많은 변화를 일궈내셨습니다. KIST 내부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입니다.

 ▲사실 40년이 넘는 외국 생활을 접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KIST 구성원 모두 신임 원장을 너무 따뜻하게 맞아줘서 지금은 이곳이 훨씬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외부에서 바라보던 것에 비해 KIST가 보유한 연구역량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이 고무적입니다.

 KIST를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소로 만들겠다는 것이 제 목표지만 사실 KIST의 연구 성과물은 벌써 세계적입니다. 다만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조금 떨어진다는 것뿐이죠.

 보직자 임명 시 희망자와 인터뷰를 거쳐 결정했는데 연구원들이 다소 생소한 시도라 당황스러워하기도 했습니다. 타운홀 미팅 등을 통해 격의없이 대화하는 자리를 만들고 연구원들이 원하는 바를 꾸준히 수용한 결과, 연구원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KIST를 기업가 정신 함양의 산실로 만들겠다는 방침을 가장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출연연이 기술이전 등 사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가요.

 ▲내부적으로는 구성원들이 ‘왜 KIST가 기업가정신을 가져야 하는지’ 이유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동안 KIST뿐 아니라 대부분 출연연들이 원천기술 개발에 역량을 투입하고 이것을 보급하는 것에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 기업가정신을 강조하다 보니 외부에서는 산업기술연구회 소속 출연연과 차별성이 모호해진다는 우려도 나타내셨는데요. KIST의 기업가정신은 단기 연구에 집중해서 성과를 급하게 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장기 연구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연구소에서 10년 후를 내다보는 연구를 한다면 해당 분야 기초 연구가 완료된 B연구소는 상용화 연구를 진행하고, 상용화가 마무리된 C연구소는 다시 새 주제를 발굴, 기초 연구를 시작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KIST가 대학과 기업 간 R&D 플랫폼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새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를 가시화하실 예정이신지요.

 ▲‘산학연’이라는 표현보다 ‘학연산’이라는 말이 순서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순수 기초연구를 담당하는 대학, 상용화 전 단계까지 책임지는 출연연, 최종적으로 대량 생산을 위한 연구를 맡는 기업으로 연결되기 때문이죠.

 올해 KIST는 대학과 기업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대학·연구소와 공동 컨소시엄을 구성, 대형 과제를 추진하는 동시에 ‘KIST-산업계(Industry)’ 컨소시엄도 꾸려 산업 정책 세미나와 기술설명회도 정기적으로 개최할 예정입니다.

 특히 중소기업은 연구 성과 상용화를 끝까지 추진할 여력이 대기업에 비해 부족한데 이를 제대로 된 수익 창출로 연계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취임 직후 이공계 정년 연장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직접 KIST에 와서 보신 결과 과학기술 연구자들의 연구 환경 개선을 위해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꼽아주십시오.

 ▲연구자의 정년은 사기와 직결되는 문제기 때문에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KIST는 올해부터 ‘연구위원’ 직급 신설을 통해 우수 연구자에게 일할 기회를 보장하고 정년 이후에는 초빙 연구원 제도 개선으로 나이에 상관없이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습니다.

 인사 평가 제도 등을 간소화해 연구원들이 즐겁고 편안하게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는 분위기도 조성할 계획입니다.

 또 정책입안자들이나 국민이 단기간 내에 연구 성과물을 바라는 풍토가 만연해 있는데 이를 개선하기 위한 대중화된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추진할 생각입니다.

 -정부가 기초기술과 산업기술 출연연을 포괄하는 선진화 방안을 상반기까지 마련한다는 목표입니다. 출연연 맏형으로서 이를 어떻게 추진하는 것이 연구자들의 창의성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을 수 있을지 제언을 해 주십시오.

 ▲얼마 전 안병만 교과부 장관이 출연연 선진화와 관련해 “조직을 갑자기 크게 뒤흔들면 안 된다”고 언급했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지난 10년만 돌아보더라도 출연연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프로젝트 기반으로 연구비를 받는 PBS 제도가 도입되고 국무총리 산하 기관에서 과기부로, 다시 교과부와 지식경제부로 출연연 소관 부처가 바뀌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근본적인 원인은 출연연이 확고한 위상을 갖지 못했다는 데 있지만 지금까지 출연연을 관리하고 통제하려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됐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출연연은 창의적인 두뇌들이 모인 집단입니다. 일단 출연연에 명확한 사명을 부여하고 그 이후에는 이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자율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출연연의 국가 발전에 대한 기여를 인정하고 이후의 성과를 기대한다면 연구원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가장 시급합니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