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보는 자녀일수록 공격적, 거리의 폭력 25∼50%가 모방.”
“시청각 알코올-감각 능력에 문제 생겨 사고력 둔화.”
80년 전후 TV와 비디오의 폭력성 및 부작용을 지적한 신문 기사의 일부다. 84년 3월 29일자 D일보는 사회면 헤드라인으로 ‘TV 폭력 공해-범죄를 가르치는 역기능’이라는 기사를 크게 싣고 있다. 82년 8월 25일자 M경제신문은 TV폭력 장면이 10대의 공격성을 유발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경계심을 잔뜩 불어넣었다. 네이버 옛날신문 서비스에서 1976년부터 1985년까지 10년간 ‘TV 폭력’ ‘TV부작용’ 등의 키워드로 검색하면 무려 1000여건의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TV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80년 컬러TV까지 보급되면서 동시에 TV 부작용에 대한 사회적 우려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TV를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세계적 게임연구자인 도쿄대 바바 아키라 교수는 “처음 TV가 보급됐을 당시 일본에서도 인구 1억명 전체가 바보가 된다는 말까지 유행했다”며 “새 미디어가 나올때 이를 접하지 못한 세대들이 불안감과 반감을 갖는 것이 역사적인 경험의 되풀이”라고 말했다. 그 때 TV의 자리는 지금 게임이 차지했다.
◇게임은 동네북=심각한 사건·범죄와 게임을 연결시키는 수사 당국과 언론 보도 경향은 몇년째 식을줄 모른다. 지난 7월에도 마산에서 50대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30대 남성에 대해 ‘온라인 게임 중독자’라는 단정적인 보도가 나왔다. 왜 중독인지, 중독이라면 그것이 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근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인과관계가 뚜렷하지 않은데도 마치 게임이 범죄자를 양산한 책임이 있는 것인양 무차별적인 공격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전자신문이 한국언론재단의 KINDS 검색을 통해 최근 4년간(2005.8∼2009.8) 보도된 게임 뉴스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부정적인 인식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기간 보도된 게임 기사 16만1500건 가운데 폭력, 중독, 살인, 범죄, 사기 등 5개 부정적인 키워드로 노출된 보도가 무려 1만8437건으로 11.4%나 차지했다. 아이들이 좋아하고 빠져든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콘텐츠에 비해 유독 규제가 심한 것도 게임이다. 이러다보니 문제만 생기면 게임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바바 교수는 “게임에 폭력성과 잔혹성이 있다면 현실 세계에 폭력성과 잔혹성이 있기 때문”이라며 “게임은 현실의 ‘카피’에서 출발해 극적인 요소와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에 현실 문제를 도외시한 게임 책임 전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게임서 핑계찾는 취약한 사회안전망=게임에 대한 이런 접근은 도리어 각종 사회 문제의 원인을 게임에 덮어씌워 진짜 문제를 가리는 부작용을 낳는다. 범죄예방에 필요한 사회안전망 구축이나 관리체계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실제 버지니아공대 사건의 경우 처음엔 게임이 표적이 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근본적인 문제들이 제기되면서 지역사회의 취약점을 해결해 나가는 계기가 됐다. 범죄의 동기나 심리원인 분석이 활발하게 연구됐고 ‘조승희가 자살 충동을 상담했음에도 지역 의료센터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대학의 관리 부실이 문제를 키웠다’ 등의 논의들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에 반해 김 일병 사건을 접한 우리 사회는 원인 규명이나 사회 불안층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는기 보다 일회성 사건으로 묻어버리고 말았다. 게임은 제대로 누명을 벗지도 못한 채 연관된 키워드로 같이 묻혔다. 게임업계의 한 관계자는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게임은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다”며 “정확한 사실관계 없이 게임을 범죄의 온상인양 지목하는 것은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과도한 규제를 양산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베이징군구병원 중독치료센터 의사이자 중국 문화부 게임 심의위원인 인즈 박사는 현지 인터뷰에서 “게임이나 인터넷 과몰입은 별개가 아니라 대개 학업이나 부모·친구 관계의 문제가 게임을 매개로 표출되는 것”이라며 “주변 환경이나 자녀의 생활을 유심히 지켜보지 않고 게임만 탓해서는 문제를 더 키우는 꼴”이라고 말했다.
◇ 게임을 모르면서 게임을 단죄?=게임은 폭력성, 사행성 등 각종 부정적인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다보니 게임에 대한 각종 규제가 쏟아져 나온다. 문제는 게임에 대한 부정적 담론이 게임을 모르고 자란 기성세대들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게임세대를 연구한 존 벡 박사는 미국의 경우 게임세대(2003년 연구 당시 34세 기준으로 그 이하 연령대)와 비게임세대간 인식차이, 행동차이, 미래에 대한 태도 차이가 극명한 대비를 이뤘다고 말한다. 이를 게임세대와 베이0비붐 세대라고 구분할 정도로 게임에 대한 경험이 세대의 큰 획을 그었다는 게 그의 연구결과이다.
전자신문 미래기술연구센터(ETRC)가 최근 국내 게임 이용자와 비이용자 총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이 차이는 드러났다. 그래프 참조 비이용자가 게임에 대해 훨씬 더 부정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용자는 게임이 스트레스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에 72%가 긍정했지만 비이용자는 59%만이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또 사회성 향상, 학습에 유리 등 긍정적인 항목에 게이머들의 찬성 비중이 4∼5% 포인트 가량 더 높았으며 업무 방해, 지인 만남기회 축소 등 부정적인 항목에 대해서는 비게이머가 더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특히 90년대말 스타크래프트 등장을 기점으로 게임의 주 이용자층으로 부상한 20∼30대가 40∼50대보다 게임을 긍정하는 비율이 더 높은 것도 같은 이유다.
이런 상황에선 게임이 ‘시대와 기술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등장한 놀이 문화이며, 다른 모든 미디어와 마찬가지로 장단점이 있다’는 균형잡힌 의견이나 ‘우리나라 특산 문화 콘텐츠 산업이자 수출 역군’이란 명제는 힘을 얻지 못한다. 김정운 명지대 교수는 “사회적으로 게임을 새 문화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담론 제기가 시급하다”며 “게임에 대한 공감대를 위해 다각적인 토론의 장을 만들고 각계 각층의 의견을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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