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장품에 대한 글을 요청 받고 조금의 망설임과 함께 내 가슴속에는 잔잔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입시의 팽팽한 긴장감의 소중한 도피처였던 시집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집은 어느 서점에서 구입한 것이 아니라 아담한 백지 노트에 친한 친구들끼리만 비밀스럽게 돌려서 한 페이지씩 시화집으로 장식한 것이다. 정확히 자작 시화집이라 해야 옳은 표현일 것이다. 우리는 정말 이 시집을 비밀스럽게 제작했다. 제작을 요청하지 않은 친구들 몰래, 그리고 또 수업 중에는 선생님 몰래 짬을 내어서 서로서로 정성을 다해 제작했다.
그것의 시작은 그냥 좋아하는 시를 조금 멋을 내어 자기만의 필체로 적어내는 것이었다. 거기에 조금씩 그림이 더해지고 서로의 시집을 넘겨다보면서 은근한 경쟁심이 무럭무럭 묻어나며 점점 모양을 더해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자기만이 아는 시를 찾아내어 친구 간에 조금은 현학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아무나 부탁한다고 친구의 시집을 꾸며주지도 않게 됐다.
탱탱한 입시 긴장감의 도피처로 시작했던 시집놀이가 이렇게 다시 또 하나의 긴장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할 무렵 다행히 우리는 졸업을 맞게 됐고 그 시집은 우리 학창시절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 됐다. 그 시집을 다시 보면 나의 치기 어린 학창시절이 보이고, 보고 싶은 친구의 얼굴과 몸내음이 느껴져 온다. 그렇게 소중했던 친구들이 이제는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시절에는 우리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그 시집은 나의 딸이 보관하고 있다. 유학시절 후 한국에 다시 정착하면서 친정에 보관했던 짐들 속에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시집을 발견하고는 무심코 딸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딸아이의 눈빛 속에는 엄마도 자기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마음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나의 추억보다도 더 소중한 아이의 이해와 사랑이 듬뿍듬뿍 묻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나의 소장품을 딸에게 넘기면서 이 시집 또한 딸의 소장품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의 소중한 추억뿐 아니라 딸과의 따뜻한 사랑을 담고 있는 이 시집이 딸의 딸에게까지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지나친 나의 욕심일까.
배은희 한나라당 국회의원 together@n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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