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때면 우리나라 사람은 흔히 고스톱을 친다. 대상도 부모·친지나 친구 사이가 주류다. 돈을 딴다는 목적보다는 소일거리나 순간의 단순한 긴장을 즐기기 위해서다. ‘고’를 외치는 짜릿함 속에서 실컷 웃고 실랑이를 벌이는 가운데 관계를 다져나가는 놀이다.
하지만 몇 푼이라도 잃을라 치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돈 잃고 기분 좋은 사람 없다’는 말은 불변의 진리다. 생각보다 큰 돈을 잃었다고 치면 상황은 더욱 급변한다. 아는 처지에 인상 쓸 수 없는 일이고 속은 부글부글 끓는다. 본전 생각도 나고 ‘왜 고스톱을 쳤나’ 하는 후회도 든다. 돈 잃고 열받는 건 부모형제지간에도 마찬가지다.
삼삼오오 의견을 나누던 한국 정치와 경제위기는 고스톱판 앞에서는 허황된 떠벌이다. 매순간이 ‘점당 얼마’의 현실이고 피박과 면피의 줄다리기다. 고스톱판만큼 순간 열중인 현실은 없다. 한순간 쏟는 몰입과 열정은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다.
고스톱의 몰입처럼 현실은 화려한 어떤 미래보다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지난 참여정부가 신정부에 준 교훈은 크다. 지난 5년간 IT중소기업은 ‘꿈(계획)’으로만 헛배를 너무 채웠다. 물론 계획 없는 미래는 있을 수 없다. 탄탄한 실행계획과 점진적인 추진이 뒷받침된 미래정책은 중요하다. 하지만 기대심리를 자극하는 ‘유혹의 정책’ 다음에는 반드시 ‘현실 정책’이 뒤따라야 한다. 산업을 육성한다면 최소한 돈을 못 벌어도 밥먹고 살 만한 시장환경은 만들어야 미래가 있다. 기대심리를 부추겨 ‘돈 잃는 게임’에 익숙하다 보면 ‘한판 더’의 몹쓸 오기에 빠지게 된다.
화려했던 IT839 정책은 지금 온데간데없다. 폐기처분돼 문서보관소에서 먼지나 쌓일 정책이 돼버렸다. 꿈을 현실로 가능하게 할 IT한국의 미래사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저 잘 그린 ‘상상도’였을 뿐이었다. 로봇산업의 육성은 로봇이 현실로 나타나 모든 것을 다 해줄으로 착각했으나 현실은 문턱 하나 못 넘는 로봇청소기가 고작이었다. 만병통치의 줄기세포는 ‘희대의 사기극’으로 끝났다. 지나치게 미래에 기댄 정책의 실수였다. 기대 수준 관리에 실패한 정책이다.
역시 문제는 현실감각이다. 서민 가계에서 라면값 100원 인상의 충격은 미래 100만원의 벌이로도 충당되지 않는다. 중소기업에 원부자재 가격의 인상은 곧 죽고 사는 문제다. 규모의 경제를 달성한 대기업은 충격이 덜할지 몰라도 중소기업에 치솟는 원자재 가격은 사형선고와 같다. 환율 때문에 앉아서 손해보는 기업을 두고 구구절절한 경제정책은 철없는 입씨름에 불과할 뿐이다.
기업에 ‘돈 버는 맛’을 보여주는 것이 우선이다. 궁극적으로 이윤추구가 목표인 기업이 ‘잃는 고스톱’만 친다면 빨리 문닫는 편이 낫다. 다음판을 기대하다 지갑만 거덜날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끓는 속까지 따진다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물론, 미래를 위한 산업의 장기적인 계획은 추진해야 한다. 고스톱의 막연한 ‘다음 판’이 아닌 급변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선 정책이어야 한다.
아무리 잘 준비된 계획이라도 현실만큼 파장이 크지 않다. 따라서 꿈과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기대수준 관리’의 정책이 필요하다. 다음 판의 불확실한 기대보다 안 될 때 한판 쉬고, 판을 읽는 것도 돈 따는 비결이다.
이경우 국제부장@전자신문, kw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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