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0일 일본 도쿄 아키하바라.
일본 최대 전자상가인 이 곳에서는 애완동물 모양의 앙증맞은 로봇이 축구를 벌이는 ‘로봇 월드컵’이 열렸다. 이에 앞서 정확히 일주일 전인 14일. 대한민국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서는 ‘e스포츠 챔피언’ 결승전이 벌어졌다.
슈팅 게임인 FPS ‘스페셜 포스’ 최강자를 겨루는 온라인 게임 대회가 아이파크몰과 터미널 전자상가 특설 경기장에서 성황리에 진행됐다. 두 대회는 사실 아무 관련이 없다. 그나마 공통점이라면 개최 장소다.
두 곳은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단지다. 하지만 다른 장소, 다른 고객을 대상으로 전혀 다른 주제로 열렸지만 두 행사는 ‘아키바(Akiba)’와 ‘용산상가’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 준다. 아키바는 아키하바라를 친근감 있게 부르는 말이며 용산은 국내 전자 유통의 메카(Mecca)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아키바에는 ‘오타쿠’가, 용산에는 ‘게이머’가 있다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도쿄 모노레일을 타고 하마마쓰초역에서 JR야마노테센을 갈아타고 도착하는 곳 바로 아키하바라역이다. 공항에서 하마마쓰초까지 30분 가량, 그 곳에서 다시 전자상가로 통하는 아키바하라역까지 10분 정도 걸린다. 어지럽게 붙어 있는 애니메이션과 만화 캐릭터·DVD 타이틀·게임기·전자 제품 판촉물이 일본 최대 전자상가에 왔음을 확인해 주었다. 아키하바라를 찾은 게 한 주를 마감하는 금요일 오후 6시께로 좀 늦은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거리는 붐볐다.
아키하바라는 한 때 ‘코끼리 밥솥’으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그 곳에서 더 이상 밥솥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대신에 가는 곳마다 만화·애니메이션·인형·로봇·캐릭터 등을 파는 매장이 즐비했고 인파로 북적였다. 아키하바라는 지금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광적으로 열광하는 마니아 ‘오타쿠(Otaku)’ 본거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오타쿠가 몰리면서 ‘아키바 르네상스’를 선언한 상태다. 역 근처 ‘교토부키야’ 2층. 주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에 등장하는 로봇과 캐릭터 상품을 팔고 있다. 이 곳에서 일하는 미쓰히코 카키모토씨는 “월 2만명 정도가 방문하고 있다”며 “이는 불과 1년 전보다 두 배 정도 늘어난 규모”라고 말했다.
역시 금요일 오후에 찾은 용산 전자상가. 일본 아키바에 비해 한참 썰렁했다. 용산은 이미 전자유통의 메카라는 명성을 잊은 지 오래다. PC붐이 일었던 90년 초·중반 전자제품과 컴퓨터하면 제일 먼저 떠올린 곳이 바로 용산이었다.
그러나 가장 많은 고객이 몰렸다는 90년대 중반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그나마 이 자리를 채우는 게 게임과 휴대폰이다. 가장 사람이 몰리는 터미널 전자상가와 전자랜드 주변의 알짜 상권은 빠짐없이 휴대폰과 게임 매장이 들어차 있었다. 이 중에서도 휴대폰은 통신 정책에 따라 매출이 들쑥날쑥하지만 게임은 그래도 꾸준히 열성팬이 찾고 있다는 것.
컴퓨터와 가전 매장은 이미 인터넷에 가격이 공개되면서 한 달에도 수십 군데씩 매장이 문을 닫는 실정이다. 게임 매장을 운영하는 한 관계자는 “몇 년 전 용산을 찾는 고객 대부분은 컴퓨터가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게임 타이틀과 게임기를 찾는 젊은 세대가 크게 늘었다”며 “그나마 고객이 붐비는 곳은 게임 매장”이라고 밝혔다.
# 고층· 현대식 건물로 ‘변신 또 변신’
아키하바라와 용산 전자상가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흐름의 하나가 현대화다. 고층 빌딩, 대형 복합 쇼핑몰이 중앙로 주변에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다. 대신에 터줏대감격인 중소 영세 매장은 상가의 뒤편으로 밀려나고 있다. 불과 5년전 현대식 건물은 전자랜드 정도였지만 지금은 용산역을 주변으로 민자역사, 스페이스9 등이 잇따라 세워지고 있다.
최근에 용산 전자상가의 랜드마크로 부상한 빌딩이 ‘스페이스9’이다. 2004년 완공한 이 건물은 전자 전문매장이 아닌 대형 복합 쇼핑몰이다. 아직 빈 매장이 눈에 보이지만 용산 유동 인구를 늘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식당에서 할인점·영화관까지 종합 쇼핑몰이 갖는 이점, 지하철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배경으로 새로운 용산의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전자상가의 현대화 바람을 일으킨 주역은 역시 전자랜드가 운영하는 직영 매장 ‘전자랜드 21’이다. 전자랜드가 처음 들어설 때 “다소 낡았다”는 전자상가 이미지를 혁신한 건물이다.
일본 아키하바라도 현대화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다. 아직도 거리 뒤편에 전자부품을 취급하는 소규모 매장이 밀집해 있지만 전면은 이미 대형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지금도 일부 빌딩 공사가 진행 중이다. 아키하바라역에서 걸어서 1분 거리에 있는 31층 규모의 ‘아키하바라 다이 빌딩’과 23층 규모의 ‘UDX’는 ‘아키바 크로스필드’로 불리며 새로운 ‘아키바 이미지’를 심어 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두 건물은 2005년과 2006년 각각 완공했다.
한편 트윈 타워의 출현으로 주변 역 경관이 확 바뀌었다. 지저분하고 혼잡한 전자상가의 이미지를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이 중에서도 최근에 가장 인파가 붐비는 지역이 ‘요도바시카메라 멀티미디어 아키바’ 대형 빌딩이다. 지난 2005년 문을 연 일본 최대 전자 전문매장인 이 곳은 유동 인구를 끌어들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건물 면적만 지상 9층, 지하 6층이며 매장 면적은 3만3000㎡에 달한다. 취급 품목은 가전에서 AV기기·PC와 휴대폰·게임 타이틀과 완구까지 70만종에 달한다. 규모면에서 일본에서 가장 큰 초대형 전문매장이다. 물론 그림자도 있다.
한 쪽에서 대형 빌딩이 들어서지만 다른 편에서는 쓸쓸히 물러나는 매장도 크게 늘고 있다. 50년 넘게 이 곳에서 ‘타카라다 전기’라는 가내 매장(Mom-and-Pop shops)을 운영해 왔다는 요미코 타카라다 사장은 “사업 환경이 너무 힘들어졌다”며 “지금은 내수(일본) 시장에 집중하기 보다는 해외로 눈을 돌리는 쪽으로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 아키바 ‘판타지랜드’로, 용산은 ‘?’
일본 아키하바라와 국내 용산 전자상가는 모두 변화의 한가운데 서 있다. 일본 전자산업의 흥망성쇠를 전면에서 맛본 게 아키하바라라면, 용산 전자상가는 국내 전자산업의 어제와 오늘과 같은 지역이다. 걸어온 길도 비슷하다. 산업 부침과 경기 변동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아키하바라는 용산과 달리 변신에 성공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아키하바라는 전기·전자제품 소매점이 밀집해 다른 곳에 비해 저렴하게 제품을 구입해 인기가 높았다. 90년 무렵부터 도쿄 근교에 대형 가전 전문점이 속속 들어서면서 이 곳을 찾는 고객도 점차 줄기 시작했다. 이어 90년 중후반 ‘PC 붐’과 맞물려 반짝 수요를 누렸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용산 전자상가와 비슷한 길을 걸어 왔다.
이후 용산은 아직도 앞길을 찾지 못한 데 비해 아키하바라는 뚜렷한 비전을 찾았다. 그리고 아키바는 ‘부활’에 성공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과 같은 콘텐츠와 소프트웨어에 초점을 맞춘 전문점이 늘면서 마니아 층의 발길이 부쩍 늘고 있다. 부품·PC 위주의 ‘싸구려’ 전자 제품 거리에서 인텔리전트 빌딩이 줄지어 들어서면서 첨단 ‘IT 문화 허브’로 재탄생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아키바’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일본은 물론 세계적인 전자상가 거리로 명성을 유지해온 아키하바라가 변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실(일반인)과 가상세계(오타쿠)를 잇는 ‘판타지 랜드’로 새롭게 위상을 재정립하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확실한 비전을 잡은 아키바는 이제 현해탄을 넘어 아직도 정체성에 시달리는 용산 전자상가에 재차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제는 용산 전자상가가 답해야 할 때다.
도쿄=강병준기자@전자신문, bjkang@, 사진=박지호기자@전자신문, jihopress@
▲오타쿠(Otaku)는
원래 의미는 집안에서 자기만의 취미에 몰두하는 사람이나 이상한 것을 연구하는 사람을 뜻한다. 지금은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광적인 마니아를 주로 일컫는다. 지난 2005년 일본을 강타했던 후지TV 드라마 ‘전차남’의 주인공이 애니메이션과 캐릭터를 좋아하는 오타쿠로 그려지면서 일본 문화를 상징하는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아키하바라는
일본 도쿄의 아키하바라 역 주변, 도쿄 지요다구 소토칸다 일대를 가리킨다. 아키하바라는 전자 전문상가로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최근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매장이 크게 늘고 있다. 대략 2000여 개가 넘는 매장이 밀집돼 있다. 이 지역의 기원은 186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자상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은 2차 세계대전 후의 일이다. 2차 대전 말기 대공습을 당해 허허벌판이 되어버린 도쿄 주변으로 암시장이 생겨났으며 국철(JR)인 소부센과 야마노테센이 교차하는 아키하바라역 주변에 라디오 부품과 전기공사 재료를 파는 노점상이 모여들었다. 이어 60년대 초반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흑백TV·세탁기·냉장고가 불티나게 팔렸고 70년대 컬러TV·에어컨·스테레오 등을 사려는 사람이 모이면서 전자 전문 거리로 발전했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 대형 할인 판매점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면서 고난의 시기를 맞았다. 이 때 나타난 구세주가 ‘파소콘(퍼스널 컴퓨터)’이다.
90년대 중반 PC 매출이 가전 제품 매출을 넘어서면서 아키하바라는 PC거리로 바뀌었다. 이어 2000년에 접어들면서 게임과 애니메이션 인형과 캐릭터·만화·그림카드 매장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거리의 모습이 확 바뀌었다. 지금은 이들 애니메이션과 게임·캐릭터 매장이 전체의 3분의 2에 달한다. ▲용산 전자상가는
서울 용산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이 바로 전자상가와 이태원이다. 용산 전자상가는 서울 한강로2가에 위치한 부지 12만9000㎡ 규모로 전자와 전기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 5000여 개가 입주해 있다.
규모만 보면 국내 최대의 전자·전기 유통단지이며 세계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 용산 전자 상가는 80년대 초반 나진상가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원래는 농산물 시장이 있었으나 서울시 수도권 정비 계획과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이 만들어지면서 용산 농산물 상인이 가락동으로 대거 이전했다. 이 자리에 나진산업이 세운상가 상인을 중심으로 전자상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진상가는 용산 전자상가를 탄생시킨 원조 격으로 용산을 가로지르는 메인 도로 양쪽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다. 이어 전자랜드·원효상가·선인상가에 이어 최근 건립한 용산역사와 스페이스9까지 규모를 점점 넓혀가고 있다. 각 상가는 조금씩 취급하는 상품이 다른데 전자랜드는 주로 PC와 가전 제품 위주다.
선인상가는 컴퓨터 상가 중 부품이나 조립 PC를 가장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나진은 과거에는 컴퓨터가 주력 상품이었으나 지금은 AV·가전과 조명·공구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용산은 한 때 전자산업이 각광을 받으면서 갈퀴로 돈을 쓸어 담을 정도로 번창했으나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면서 찬바람이 불고 있다. 주력 아이템도 점차 바뀌어서 초기 전자부품에서 가전·PC가 득세하다가 지금은 게임과 휴대폰 쪽으로 점차 무게중심이 옮겨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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