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공간에 신은 존재할까.’
신이 존재한다면 신의 섭리는 사이버 공간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신과 인간의 영적인 교감은 어떻게 이뤄질까. 좀처럼 해답을 얻기 힘든 질문이다. 현실세계에서도 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일상에 파묻혀 사는 게 우리네 삶인데,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에 신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처럼 보인다.
예수회 소속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는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이자 동성애자였던 오스카 와일드의 개종 사실을 뒤늦게 세상에 알려 교황청이 와일드를 복권하도록 이끌었던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최근 예수회 기관지 ‘라 시비타 카토리카’에 실린 기고문을 통해 ‘가상 세계에도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던졌다. 3차원 시뮬레이션 사이트인 ‘세컨드 라이프’에서 현재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톨릭 교계가 이해해야 하며, 한 발짝 더 나아가 그 세계에 직접 뛰어들어 황폐한 영혼들을 교화하고 개종하려는 노력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예수회 교단이 과거 아프리카와 중국에 수백명의 선교사를 파견, 선교 활동을 했듯이 이제는 세컨드 라이프라는 가상의 영토에 선교사를 보내 초심자와 아바타들을 영적인 세상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스펠 2.0’ 시대에 맞게 선교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파다로 신부가 바라보는 가상세계는 현실세계의 축소판과 다름없다. 인간의 분신인 수많은 아바타가 성적인 유혹에 노출돼 있으며, 매춘, 간음, 어린이에 대한 성도착이 자행되기도 한다. 현실세계의 인간은 가상세계에 자신의 분신인 아바타를 만들어 현실세계에서는 꿈꾸기 힘든 갖가지 세속적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하다. 현실세계와는 분리된 또 다른 자아가 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가상세계의 자아는 현실세계의 자아 이상으로 종교적 영감과 경험을 갈망하고 있다는 게 스파다로 신부의 시각이다.
최근 진화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화제작 ‘만들어진 신(원제 신이라는 망상)’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책에서 도킨스는 종교가 없었다면 세상이 훨씬 평화로웠을 것이라며 근본주의자와 광신자들이 전쟁·대학살 등 재앙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종교가 없었다면 십자군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고 9·11테러도 없었을 것이라는 게 무신론자 도킨스의 생각이다. 물론 탈레반과 같은 전투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킨스 시각에서 본다면 세컨드 라이프 등 가상세계에서 행해지는 종교활동은 철두철미 인간의 창조물일 수밖에 없으며 2바이트 코드 체계로 이뤄진 ‘만들어진 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이버 공간의 신의 존재 유무를 떠나 명백한 사실은 많은 종교가 사이버 공간이라는 신천지에 앞다퉈 뛰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세컨드 라이프에도 이미 성당·교회·시나고구(유대교 회당)·모스크들이 입주해 선교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는 탈레반과 같은 무슬림 근본주의자나 ‘다빈치 코드’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진 기독교 근본주의자 ‘오푸스 데이’ 등이 세컨드 라이프 같은 가상 세계에 터를 잡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가상의 영토를 선점하려는 종교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 사이버 공간에서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상상하기 싫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맑은 영혼의 아바타를 가상세계에서 볼모로 잡아 현실세계의 인간을 윽박지르고 억류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가상 공간의 미래 모습을 상상하는 게 쉽지 않다. 다만 종교적 근본주의자가 가상세계에서 판치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텔레반에 억류돼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의 무사 귀환을 빈다.
장길수 논설위원 ksj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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