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1 지난 6월 초순 하이닉스반도체 대치동사옥 12층 사장실. 취임 50일을 갓 넘어 채 신임 딱지도 떼지 못한 김종갑 하이닉스반도체 사장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김 사장의 시선은 몇달째 급락 곡선을 그리고 있는 D램 가격 그래프, 연일 쏟아지는 ‘하이닉스 2분기 0000 적자’라는 글자들이 떠 있는 PC에 고정돼 있다. 수화기 타고 들려오는 귀에 익은 임원의 목소리도 영 밝지 않다. 딱 뿌러지게 말은 안하지만, 2분기 실적 발표를 앞두고 6월 판매라도 무리하게 추진할 지를 묻고 있는 듯 했다. 취임하자마자 꺾이기 시작한 메모리 가격. ‘월말 밀어내기’라는 업계의 보편적이지만 바람직하지 못한 유혹이 강력하게 김 사장을 엄습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김 사장에 입에서는 “인벤토리 캐리(재고 보유)로 갑시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김 사장의 머리 속에는 “지난주 과거 직장의 동료들에게 ‘한국식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겠다’고 선언하던 장면이 스쳐갔다.
#장면2
같은 시기, 하이닉스 직원들이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화제는 어느 덧 암울한 2분기 실적, 그리고 몇몇 증권사가 내놓은 너무나 부정적인 리포트로 옮겨갔다. 그 순간 한 직원이 소주잔을 들었다. “우리 00증권 물먹여 봅시다. 건배.” 이들이 00증권 보고서를 물 먹일 수 있는 방법은 사실 별로 없다. 6월 말까지 남아 있는 기간, 똘똘뭉쳐 생산과 영업에 충실하는 것 밖에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6월 하반기 들어 메모리 시황이 좋아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희망은 있다.
#장면3
어둠이 내려 앉은 지난 24일, 이천공장 앞 소주집. 앳된 모습이 채 가시지 않은 한 무리 젊은이들과 시종일관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는 중년의 아저씨가 틈틈히 웃으며 소주잔을 부딪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삼겹살 파티가 한창. 김 사장 부임 이후 2주일에 한 번씩은 열리는 CEO와 직원들의 화합의 장이다. 이날 이들의 대화에는 자신감이 녹아 있다. 연일 ‘적자’라는 단어를 쏟아내던 증권사 리포트들이 잊고 있던 단어를 생각해 낸 듯 ‘흑자’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당연히 적자라고 예상했던 것이 뒤집어졌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어닝 서프라이즈’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사실 실적이야 한 만큼 나오는 것. 그 순간 더 빛난 것은 그들이 회사를 위해 하나된 모습이었다. 김 사장의 머리에는 김인식 감독의 ‘야구는 사람이 한다’는 말이 떠 올랐다.
“장기적 관점의 이익과 단기적인 이익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위적인 숫자 챙기기는 장기적으로는 손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흐르듯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며 신뢰를 쌓는 기업이 궁극적으로는 기업가치를 높게 평가받을 수 있지요”
김종갑(56) 하이닉스반도체 사장이 취임 후 100일 동안 심사 숙고해 내린 결론은, 재임기간 ‘100년 지속 가능한 기업’의 기초를 다져 놓는 것이다. 이 때문에 김 사장은 한 달 보다는 분기, 분기 보다는 1년, 1년보다는 하이닉스의 10년에 도움이 되는 일에 우선적인 가치를 둔다. 취임하자마자 하이닉스반도체의 중장기 마스터플랜을 준비한 것도 이 때문이다. 환경경영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 하이닉스에게 중요한 것은 한 달·한 분기 실적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종합반도체업체로서 100년 지속 가능한 기업의 위용을 갖추는 것입니다. 하이닉스는 10년 후인 2017년 주주·고객·사원·국민 모두가 만족하는 최고수준의 기업가치를 가진 회사로 도약하며 한국식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것입니다”
일희일비하며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현재 상황에 충실하면서도 미래를 위해 기초공사를 탄탄히 해 놓는 것이 롱텀으로 볼 때 절대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물론 기초공사에는 사람의 능력을 키우는 것도 포함된다. 변화와 발전 모두 사람이 불러오는 것이니까.
김 사장은 결제를 싫어한다. 아니 대부분의 결제권을 본부장급에 이관했다. 자신이 직접하는 결제는 책임이 따르는 은행 제출 서류 정도다.
“하이닉스 임직원 2만1200여명이 하는 일을 다 알 수도 없는 바에야, 해당 업무를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사람의 생각이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시스템이 더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김 사장 취임이후 하이닉스에는 임원들의 출장에도 결제는 없다. 필요하니까 가는 것인데, 불필요한 절차로 힘을 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이유다. e메일로 ‘출장 다녀오겠습니다’하면 그걸로 족하다.
김 사장 취임 이후 하이닉스반도체에 불고 있는 또 하나의 변화는 ‘부서간 장벽’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테스크포스의 활성화가 계기가 됐다. “일의 성과를 판단할 때, 실제 일을 전담해 추진한 사람과 그 일을 보조한 사람이 모두 좋은 고과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정착시킨 것이 주효했습니다. 정보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화합의 분위기가 높아지고 있지요.”
김 사장은 ‘대·중소기업 상생’도 하이닉스의 롱텀 가치를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중소 협력업체들의 성장이 곧 하이닉스 성장과 직결된다는 믿음이 있다. “우리 제조업의 67%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엮여 있습니다. 그런데 대기업은 단기적으로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납품가를 깍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소기업들은 크지 못하고 대기업들은 울며겨자 먹기로 외국기업의 높은 단가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는 것이지요. 하이닉스 사장 취임 직후 윤종용 전자산업진흥회장에게 인사를 갔는데, 그 분도 국내 부품·소재·장비업체를 잘 키우면 모기업도 실질적으로 30% 이상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말을 해 주시더라구요. 차관보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상생경영은 결국 길게 보는 경영이라고 정의하면 되겠네요’라고 학문적으로 정의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거다 싶기도 했습니다.”
하이닉스반도체는 10년 후인 2017년, 세계 최고의 반도체업체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제2창업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 선봉장이 된 김 사장은 기업도·상생도, 모두 ‘사람이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사람’인 자신의 능력을, 높은 잣대를 들이대며 기업 CEO로서 엄격하게 검증하고 있다. 공무원 시절에 그랬던 것 처럼.
‘오늘은 당신의 남은 인생의 첫날입니다(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슨)’ 최근 김사장의 가슴속을 파고 든 말이다. 그리고 이는 하이닉스의 대항해를 책임지고 있는 그의 자세이기도 하다.
심규호기자@전자신문, khsim@
<약력>
△74년 성균관대 행정학과 졸업 △75년 행정고시 합격(17회) △83년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 졸업 △93년 미국 인디애나대 대학원 경제학박사과정 수료 △97년 상공자원부 통상협력국장 △98년 산업자원부 국제산업협력국장 △99년 산업정책국장 △2003년 산업자원부 차관보 △2004년 특허청장 △2006년 산업자원부 제1차관 △2006년 성균관대 행정학박사 취득 △2007년 하이닉스반도체 대표이사.
<상훈>
△84년 상공부장관표창 △2002년 대통령 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