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입니다. 당시 디스플레이 사업에 눈을 뜬 업체는 삼성, LG, 현대전자, 대우오리온전기 4곳이었습니다. 실무자들이 종종 디스플레이연구조합의 골방을 빌려 LCD냐, PDP냐를 놓고 치열하게 토론했습니다. 모자란 기술과 특허를 서로 어떻게 극복할까를 두고 고심했습니다. 그 때 우리의 고민은 하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본을 따라 잡을 것인가.”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 이상완 초대회장(58)은 격세지감에 흠뻑 빠져들었다. 불모지와 다름없던 한국 디스플레이산업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숨가쁘게 달려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듯했다.
디스플레이 최강국을 건설을 기치로 내 건 디스플레이협회가 드디어 출범했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무한 경쟁을 펼치던 삼성과 LG가 손을 굳게 잡았다. 지난 16일 삼성전자 탕정사업장에서 만난 이 회장은 지난 날을 회상할 때면 감회에 젖어드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내 위태로운 디스플레이 강국의 현주소를 떠올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4∼5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우리는 세계 정상에 올라섰지만, 이제는 쫓기는 입장이 됐습니다. 일본도 90% 이상 독점하던 시장을 눈 깜짝할 사이 한국에 내주지 않았습니까.”
이 회장은 협회 설립이 늦은 감은 있지만, 다시 14년 전 ‘골방시절’의 초심을 되새기는 전환점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디스플레이업계에 뛰어든 것은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7년간 메모리와 시스템LSI 등 반도체 분야에서 개발, 생산, 마케팅 등을 두루 맡아 온 그는 LCD총괄의 모태가 된 AM LCD사업부장으로 발탁됐다. MBA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 지 6개월도 안돼 회사가 그를 불러들였다.
“당시에는 정말 초라했습니다. 불과 엔지니어 30여명이 고작이었습니다. 2년간 엔지니어들이 연구에 몰두한 끝에 95년에야 비로소 양산라인을 처음 갖추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회장은 특유의 추진력을 앞세워 2라인, 3라인을 연거푸 가동하며 첫 양산에 나선지 불과 3년만인 1998년 중대형 LCD에서 삼성이 세계 1위에 오르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4년 후인 2002년. 마침내 전체 매출에서 세계 1위 타이틀도 거머 쥐었다. 2004년 세계 최초로 기획한 7세대 라인에 일본 소니를 합작 파트너로 끌어들이면서 일본 전자업계를 충격속으로 몰아 넣었다. 이 회장의 미래를 보는 탁월한 능력, 일단 사업 방향을 결정하면 마치 ‘불도저’처럼 밀어 부치는 추진력이 빚어낸 결과였다.
“사업 초창기 당시 주류였던 11.3인치 대신 12.1인치 투자에 나서 새로운 표준을 만들낸 것이 주효했습니다. 대형 PC업체들이 표준 사이즈인 11.3인치를 만들어 줄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했지만,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지 않으면 영원히 후발주자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12.1인치를 새로운 표준으로 만들면서 삼성은 일본을 앞지르는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 회장의 추진력과 관련된 일화는 이외에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2004년 6월 탕정사업장 가동을 10개월이나 남겨두고, 사무실를 기흥에서 탕정으로 옮긴 것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 되고 있다.
당시 건물 내벽 공사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사장이 집무실을 옮겨온다는 소식에 건설회사는 밤을 새워가며 공사에 나섰고, 결국 7세대 조기가동으로 삼성전자가 LCD업계 독보적인 1위를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올해 10월 가동 예정이던 8세대 라인이 2개월 앞당겨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차세대 성장동력 디스플레이 사업단장인 건국대 김용배 교수는 이 때문에 이 회장을 “꿈을 현실로 만드는 인물”로 평한다. 이 회장이 업계 관계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디스플레이협회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배경에도 이같은 능력과 열정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그래서 더욱 어깨가 무겁다고 말했다.
“요즘 일본과 대만업체들은 한국 업체 대한 공격 수위를 높이고 있습니다. 일본업체들은 대만에 기술을 지원하며 연합전선까지 벌일 정도입니다. 급성장하는 중국의 기세도 무섭습니다. 그동안 우리 업체들은 빠른 시간에 세계 정상에 오르기 위해 바깥만 보고 뛴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계 1,2위에 올랐지만 한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협력은 등한시한 감이 없습니다.”
이 회장은 일본과 대만의 공세에 맞서 14년전 골방에서 머리를 맞댔던 지혜가 다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협회 발족도 바로 이같은 구심점을 세우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우선 패널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진 설비나 소재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데 주력할 것입니다. 장비의 경우 국산화가 진전됐지만 핵심 부품은 여전히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소재는 여전히 거의 외산에 의존하는 상태입니다. 물론 이들의 경쟁력을 단기간에 올리기는 힘들 것입니다. 협회는 물론 정부와 학계가 힘을 합쳐 꾸준히 육성해야 가능합니다.”
그는 이와 함께 삼성과 LG로 수직계열화된 소재의 교차구매와 같은 단기적인 성과도 의욕적으로 추진할 뜻을 내비쳤다. 장비도 특허문제가 걸리지 않는다면 삼성과 LG의 벽을 허무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협회 탄생과 함께 이슈로 떠오른 기판 표준화에 대해서도 “같은 사이즈로 가는 문제는 이미 10여년전 우리 업체들이 일본 업체들에 요구 했던 것으로 제조원가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결코 나쁘지 않다”며 “하지만 범용 제품의 표준화를 추진하되 시장 선점을 위한 업체별 차별화 전략도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이 회장이 지난 2004년부터 2년간 업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정보디스플레이 학회장으로 활약한 것도 협회를 이끌어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회장은 학회장 시절 매년 미국에서 열리는 정보디스플레이학회(SID)에 참가한 학회원들과 빠짐없이 만찬을 가지는 등 두터운 친분을 쌓아왔다.
무서운 추진력 이면에 넘치는 그의 포용력도 협회를 원만하게 이끌어 갈 강점으로 꼽히고 있다.
삼성전자 조용덕 상무는 “LCD총괄 임원들은 1년에 서너번 사장님이 불쑥 내미는 연극이나 뮤지컬 티켓을 받아 부부동반으로 함께 공연을 관람하곤 한다”며 “이같은 조그만 배려와 마음 씀씀이에 임원들의 사기가 재충전되곤 한다”고 귀띔했다. 한 때 삼성전자에 근무한 디스플레이서치코리아 안현승 지사장도 “이 사장님은 최고 임원으로 승진한 이후에도 어려울 때 도움을 준 교수들과 특허청 관계자들에게 항상 감사함을 표현할 정도로 잔 정이 많은 분”이라고 기억했다.
이 회장은 그래도 그동안 경쟁관계에 있던 PDP업계와 함께 발전할 방안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다.
“이전에는 삼성전자 사장으로 LCD 중심으로 디스플레이 시장을 바라봤습니다. 이제는 협회장 자리에서 PDP, OLED 산업 발전까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물론 시장의 논리에 따라 강한 기술이 살아남는 경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도 업계 공동 발전을 위해 소재 공동 개발과 같은 부분적인 협력은 가능할 것입니다.” 이 회장은 이제 첫 단추가 꿰어진 만큼 너무 조바심을 내는 것도 경계했다. 조만간 꾸려질 실무위원회를 통해 3대 상생협력 전략과 8대 실천과제를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인터뷰를 마치자 마자 서둘러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LCD업계 대부’에서 이제 ‘한국 디스플레이산업 대표’로, 그리고 여전히 삼성전자 LCD사업 수장으로 그의 어깨는 정말 무거워 보였다.
“이제 벽을 모두 허물자고 했습니다. 그동안 사분오열돼 있던 업계, 학계, 단체 등이 모두 뭉치면 디스플레이 최강국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종종걸음쳐 가는 그의 발걸음은 그렇게 무겁지 않아 보였다.
탕정=장지영기자@전자신문, jya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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