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정부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뉴스를 공개했다. 지난 수십년 동안 말로만 외쳐온 ‘종이없는 전자문서 시대’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종이문서를 전자문서로 대체하는 데 성공한 예가 없는만큼 세계 최초의 시도다.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일을 과감히 실천하려면 정책당국자의 결단과 성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감이 뒤따라야 한다.
그 자신감의 결정체가 바로 공인전자문서보관소라는 제도다. 공인전자문서보관소는 전자문서를 위·변조의 위험에서 안전하게 보호하는 제3의 기관을 말한다. 여기에 보관된 문서는 법적으로 변경되지 않은 것, 즉 진본으로 인정된다는 뜻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공인전자문서보관소 시설 및 장비 등에 관한 규정과 전자문서보관 등 표준업무준칙을 공표하고 시범사업을 거쳐 오는 9월에 본격 시행할 예정이다.
정부 방침대로라면 오는 11월에 세계 첫 공인전자문서보관소가 만들어지고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종이없는 전자문서 시대를 열게 된다. 정부와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기업체들도 하루에 수천, 수백 건의 종이문서를 만들어내고 또 일정 기간 보관해야 하는 서류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종이문서의 생산·보관·유통에 드는 비용이 은행권에서는 연간 1500억원, 제조업체에서는 연간 1조원 이상이라는 추산이다.
정부 관계자는 “공인전자문서보관소가 생기면 종이문서의 생산·보관·유통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업무 프로세스 자체가 전자화됨으로써 사무실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기대했다.
이렇듯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공인전자문서보관소가 시범사업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시범사업 입찰이 두 번이나 유찰돼 결국 수의계약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시범사업 예산 규모가 1억8000만원으로 채산성을 맞출 수 없을 정도여서 해당 업체가 외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범사업도 문제거니와 세계 1호 공인전자문서보관소를 만드는 데 올해 기껏 5억원의 예산이 책정돼 있다니 거창한 장밋빛 비전에 비해 초라해 보인다.
물론 국민 세금으로 하는 사업인만큼 정부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또 1호 공인전자문서보관소의 규모가 어느 정도여야 합당한지도 쉽게 판단하기는 힘들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려는 정책담당자의 자세는 비난받을 일이 못 된다.
그러나 문서혁명을 몰고 올 야심찬 계획에 비추어 예산이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가 없다. 수백, 수천년간 이어져온 종이문서를 없애고 과감히 전자문서로 대체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에 이 정도 실천 의지밖에 보여줄 수 없는지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공인전자문서보관소는 도입 자체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위·변조 없는 문서관리에 필요한 기술은 물론이고 관리체계 검증까지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 게다가 전자문서가 법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인식의 변화도 끌어내야 한다. 특히 민감한 서류를 다루는 민간이 이용하는만큼 공인전자문서보관소의 현실적이고도 합리적인 운영방식을 면밀하고 다각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는 공인전자문서보관소 사업이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대폭 힘을 실어줘야 한다. 무엇보다 충실한 사전 검증을 위한 예산 증액이 불가피해 보인다. 필요하다면 시범사업 규모나 기간, 참여기업을 늘리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1호점 개설 시기가 아니라 실효성 있는 1호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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