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매우 협소하다. 체르노빌 방사능 유출사고나 방폐장 부지 선정과정에서 드러난 사회적 갈등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에 북핵문제까지 가세하면 원자력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거의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다.
이 같은 선입관 때문인지 우리는 그동안 원자력 분야가 BT·IT·NT·우주개발·수소에너지 등 분야와 기술적으로 맞물리면서 발전해 왔다는 점을 간과했다. 최근 원자력연구소가 과학의 달을 맞아 개최한 ‘2006 원자력 체험전’은 방사선 기술(RT)과 다른 과학분야 간 기술융합이 차분히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우선 RT와 BT의 결합이 의외다. 이미 오래전부터 식품 개발이나 농산물 품종 개량에 방사선 조사(照射)기술이 응용됐다고 한다. 해외로 수출되는 많은 가공식품에 장기보존과 멸균처리를 위해 방사선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유전자 변형식품(GMO)과 달리 방사선 조사 식품은 안전성이 국제적으로 입증됐다. 한 예로 미군은 이라크 전쟁에 참전중인 병사들에게 방사선 조사 전투식량을 제공하고 있다. 사막이라는 특수 환경에서 전투를 치러야 하는 병사들에게 장시간 상하지 않는 전투식량이 필요한데 RT가 대안이 됐다. 러시아와 미국은 오래전부터 우주인이 먹는 우주식량에 방사선 조사 기술을 채택했다. 2008년 우주인 배출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도 방사선 조사 우주식량을 개발중이다.
농산물이나 식물에 방사선을 조사하면 돌연변이 유전자가 생겨 새로운 품종 개발도 가능하다. 신품종 무궁화, 태풍에도 견디는 키 작은 벼, 관상용 난(蘭) 등이 여기에 속한다. 대덕특구 내 첫 연구소 기업인 선바이오텍이라는 회사는 RT를 활용해 기능성 화장품이나 건강 식품까지 내놓았다.
원자력은 차세대 에너지원인 수소에너지 개발에도 쓰임새가 있다. 원자력을 이용해 물을 가수분해한 후 수소에너지를 얻는 연구가 진행중이다. 한동안 원자력수소 에너지 개발사업이 지지부진했으나 최근 다시 탄력을 받고 있다. 원자력 수소에너지 생산기술이 확보되면 차세대 연료전지나 수소자동차의 실용화에 한발짝 더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뜨거운 감자인 원전 문제는 과학과 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한마디로 원전은 과학기술의 총아다. 사람이 근접하기 힘든 원전 시설물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감시 및 유지보수·장애물 통과·3차원 그래픽 제어 등이 가능한 원격제어 로봇이 필요하다. 원자로 내부의 이물질이나 환경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물체인식이나 추적이 가능한 고정밀 센서 기술과 네트워크 관리 기술이 있어야 한다. 과기부가 4300억원을 투입해 2010년까지 개발하려는 ‘해수담수화 일체형 원자로(스마트) 사업’도 원전을 응용한 기술이다. 원자력을 이용해 바닷물을 담수화하는 프로젝트인데 상용화되면 물 부족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석유 에너지를 이용해 바닷물을 담수로 만들고 있는 중동국가에 스마트 원자로를 수출하는 것도 가능한 시나리오다.
우리나라는 세계 6대 원자력 국가 가운데 하나다. 이미 20개의 원전을 운영하고 있으며 웨스팅하우스 등 선진 기업이 장악했던 핵심 원자로 및 관제 기술도 국산화했다. 국제원자력기구에서의 발언권도 세졌다. 물론 천연 우라늄이 60년 정도면 동날 텐데 원자력에 과도하게 투자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우라늄은 재처리 기술이 발달해 적어도 몇 세기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최근 원자력 관련 분야 종사자들은 원자력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고무돼 있다. 작년 경주가 방폐장 부지로 확정되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방폐장 말고 다른 원자력 관련 시설을 유치하는 게 가능한지 타진중이란 얘기도 들린다.
모처럼 조성되고 있는 원자력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잘 활용하려는 정부 및 관계기관의 노력이 절실한 때다.
◆장길수 경제과학부장 ksj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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