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스위스메이드`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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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경제상식 중의 하나는 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제품과 산업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해 경제 규모를 늘려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식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

 PC산업이 그 대표적인 예다. PC의 성능은 끝없이 발전하고 있지만 그 결과로 관련 산업이 계속 번창하고 있는가.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다.

 세계 1, 2위를 다투던 HP와 컴팩이 합병을 했지만 위기에 몰려 있고, 산업 표준을 만들어 낸 PC산업의 원조 격인 IBM은 아예 PC 부문을 중국의 레노버에 팔아 버렸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컴퓨터 회사인 삼보가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1위 업체인 델을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상위권 업체가 모두 어려운 형편인 것이다. 독점적인 위치에 있는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외하면 관련 부품업계도 고사 직전의 상태다.

 DVD플레이어도 마찬가지다. 한때 VCR를 대체해 영상 산업의 발전을 주도할 제품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대표적인 전자제품이 돼 버렸다.

 이런 급속한 판매가격 하락의 이면에는 눈부신 반도체기술이 한몫을 하고 있다. 시스템온칩(SoC)이란 기존 여러 개의 반도체로 만들어진 전자제품의 다양한 부품을 한 칩에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나 일본의 유명 업체이건 중국의 군소 업체이건 최신 SoC 칩을 사용하면 거의 비슷한 성능의 제품을 쉽게 싼 가격에 만들 수 있다.

 이는 유통업계에 타격을 준다. 너무 싼 가격 때문에 마진이 줄어서 질이 좋은 상담이나 설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고급 제품 전문점들이 경쟁에서 탈락하고 있다. 부품업계에도 타격이 온다. 제품을 차별화할 수 있는 특색 있고 기술적으로 앞선 다양한 반도체 부품을 출시하고 싶어도 워낙 가격 압박이 심해 제품에 적용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결국은 많이 팔릴 수 있는 염가형의 반도체에 집중하게 된다. 반도체뿐 아니라 모든 부품업계가 품질보다는 가격 경쟁력 위주로 제품을 생산하게 된다.

 심각한 문제는 PC나 DVD뿐 아니라 우리나라가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는 휴대폰이나 디지털TV, 홈시어터 등의 고급 전자제품 시장에도 이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생산 단가 25달러짜리 휴대폰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MP3플레이어 업계에서는 애플이 획기적인 저가로 플래시형 플레이어를 내놓아 우리나라의 경쟁 회사들을 위협하고 있다. 이제 겨우 세계 시장에서 강자로 부상한 우리 전자업체들로서는 모두 공멸하는 블랙홀에 빠져들어가지 않도록 획기적인 결단이 필요한 시점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스위스 시계산업의 예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술의 발달로 전자무브먼트가 나타났을 때 정확한 시계를 만드는 기술은 경쟁의 요소로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스위스의 유명 회사들은 가격을 내려서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데 몰두하지 않고 다른 종류의 만족감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었다. 시장 점유율에 신경쓰던 일본 업체들은 몰락했지만 롤렉스와 오메가는 아직도 건재하다.

 이제 우리 전자업계도 여태까지 기술 일변도의 사고에서 탈피해서 구매자의 감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 플러스 알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 경쟁의 각도도 달라져야 한다. 기능이나 가격에서 앞서나가는 것보다 어떤 제품이 더 구매자의 감성에 잘 호소할 수 있는지를 놓고 경쟁한다면 경쟁은 생산적이 될 수 있다. 모든 생산공장이 중국으로 달려가는 것도 문제다. 스위스 시계에 쓰여 있는 ‘스위스 메이드’가 그 자체로 부가가치가 된다는 점도 참고했으면 좋겠다. 21세기에는 전자제품도 실용적인 의미를 넘어 문화적인 즐거움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브랜드, 컨셉트, 디자인, 문화적인 배경 등 모든 면에서 명품의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제품을 갖지 못하면 지금 아무리 세계적인 업체라도 점점 커가는 블랙홀의 인력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오종훈 펄서스테크놀러지 사장(포항공과대학교 교수) jhoh@puls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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