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디지털 대한민국(4)]기업의 탄생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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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요전기가 최초로 생산한 흑백TV P-3202

 ‘(주)디지털 대한민국, 마침내 태동하다!’

대한민국 디지털 신화는 한국 전쟁 종료와 동시에 본격화됐다. 50년대 후반 완전 초토화됐던 국내 전기통신 시설이 원상복귀되면서 전자산업 역사가 시작됐다.

그 선두에는 락희화학공업사가 설립한 금성사(현 LG전자)가 있었다.

◇구인회의 결단=1957년 이른 봄. 화장품 제조로 출범 후 칫솔과 플라스틱 그릇, 럭키치약 등을 잇달아 히트시킨 락희화학공업사 구인회 사장은 신 사업 구상에 착수했다. 그동안의 성공을 바탕으로 향후 롱런할 수 있는 새로운 캐시카우(Cash Cow)를 찾아야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이에 윤욱현 기획부장(금성통신 사장 역임)은 ‘라디오 국산화’를 제안했다.

구 사장은 고민했다. 주변에서 국내에는 생산업체가 한곳도 없고, 미군 PX를 통해 라디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또한 자체 기술로 감당할 부분이 너무 많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 사장은 이런 부정적인 목소리속에서도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우리가 언제까지 외국 제품을 사용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금성사의 출범=58년 4월 윤욱현 부장을 주축으로 전기기기 생산공장 건립안이 마련되면서 락희화학의 라디오 생산계획은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시설 도입을 위해 8만5000여달러의 초기 예산을 책정하고 독일 기술자인 헨케에게 전자기기의 설계와 제작을 맡겼다. 또 라디오 생산공장은 금성합성수지공업사 공장으로 정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경남도청에 공장(회사) 명칭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이 신청서에 변경된 회사명으로 ‘금성사’가 적혀 있었다. 바로 현재의 LG전자 전신이다.

◇‘A-501’ 탄생=금성사는 라디오 설계자로 김해수씨를 찾아냈다. 한국 전쟁때 부산에서 미군 라디오전문 수리점을 운영했던 교사 출신의 평범한 인물인 그는 라디오 조립기술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김해수 기술담당은 독일 기술자인 헨케의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 산요의 제품을 벤치마킹할 것을 제안했다. 아울러 진공관·스피커·레지스터·볼륨컨트롤 등은 독일에서 제품을 수입하되 스위치·트랜스·플레이트·소켓 등은 자체 개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것이 향후 금성사가 라디오 부문에서 빠른 시일내에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59년 5월 첫 번째 설계모델이 나왔다. 진공관 5개를 사용하며 2밴드형 슈퍼헤테로다인 수신방식을 채택했다. 중간주파수는 445kHz였으며, 전원은 100V를 표준으로 전력사정이 나쁜 것을 감안해 50V이하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스피커는 5인치, 최대 출력은 2W로 정했다.

그리고 3개월여의 시제품 개발과정 그리고 3개월여의 상품화 과정을 거쳐 한국 최초의 상용 라디오인 ‘A-501’은 탄생했다. 이 제품은 59년 11월15일 전국 상점으로 80대가 출고됐다. 당시 가격은 2만환.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제품의 가격이 3만3000환 정도였으니 40% 가량 저렴한 것이었다.

◇신모델 속속 출시=금성사는 ‘A-501’ 시판 다음해인 60년에 무려 7종의 신모델을 출시하며 본격적인 전자업체로 자리매김을 해나갔다. 두 번째 제품은 전기용 4구 모델인 A-401. 젊은층을 타깃으로 최초로 라운드 다이얼을 부착하고 캐비닛도 작게 만들었다. 그러나 배선 불량 등으로 출하 한달만에 단종됐다.

이후 B-401, A-502, A-503, TP-601, T-701, T-702 등의 모델을 2∼3개월을 주기로 내놓았다. 이 가운데 60년 3월에 나온 TP-601은 국내 최초의 포터블 트랜지스터 라디오였다. 비록 이들 대부분이 기술적 한계 등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시발점을 끊었다는 점 그리고 기대이하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를 통해 도전을 했다는 측면에서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구인회 사장의 미주 시찰

구인회 사장은 금성사 설립 시점인 1958년 11월 생애 첫 번째 해외출장인 미주시찰길에 올랐다. 후진국인 우리나라에서 전자공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선진국 동태를 파악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다음해 2월까지 100여일 가까이 이뤄진 이 출장에서 구 사장은 선진산업 현장을 보면서 신사업에 대한 인식과 각오를 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LG전자측에서는 구 사장의 당시 출장에 대해 “해외의 선진기술을 접했다는 사실과 함께 해외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돼 향후 우리나라 전자공업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소개한다.

▲전자산업 진출 3대 당위론

락희화학공업의 전자산업 진출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주변 대다수가 ‘화장품·화학업체가 어떻게 전자산업에 뛰어들 수 있느냐’며 만류했다. 특히 당시 철옹성과 같던 미국 제품을 꺾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구 사장도 어느정도 ‘가능성’은 있다고 보았으나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이 시점에 윤 부장이 꺼내든 카드가 ‘전자산업에 뛰어들어야 할 당위론 세가지’였다. 구 사장이 형제와 장남을 모아 놓고 전격적으로 전자산업 진출을 발표하게 된 계기로 알려져 있는 3가지 당위론은 △락희 화학이 수년간 축적한 플라스틱 기술로 라디오 케이스를 상당부문 자력생산할 수 있다는 점 △일본 통산성 경제백서를 통해 전자공업의 발전 전망이 밝다는 점 △외국 기술자 유치를 통해 기술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사진 한 장으로 보는 전자산업

-삼성산요전기가 최초로 생산한 흑백TV P-3202

1969년 삼성이 일본 산요전기와 기술제휴를 통해 설립한 삼성산요전기는 1970년 11월18일 첫 번째 합작 제품으로 12인치 흑백TV인 ‘P-3202’를 출시했다. 출시와 동시에 대량생산에 돌입, 수출까지 한 이 제품은 삼성 전자산업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삼성산요전기는 이 제품 만들기 위해 출범과 동시에 공장 건설에 나섰다. 1970년 3월 말까지 대지 3만7000여평에 라디오 생산라인을 비롯해 전해 콘덴서 생산라인, 금속 생산 라인 등을 건설했다. 이어 기계를 도입하고 아울러 라디오 생산라인안에 부설로 스피커, 편향코일, 고압 트랜스 등의 부품 라인을 설치했다. 본격적인 TV 생산을 위한 공장은 1969년 12월에 착공해 8개월 만인 1970년 7월28일 완공했다. 당시 TV 생산라인은 연산 15만대 규모였다.

33명의 자체 기술요원들은 흑백 TV 생산에 매달렸다. 그러나 조립라인은 하나뿐이고 대량생산은 불가능했으며 특히 원자재 국내 조달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원자재 대부분은 협력사인 일본 산요전기에서 공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역경 속에 70년 11월 ‘P-3202’가 마침내 완성됐다. 이 제품은 비록 삼성산요전기의 첫 번째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으로 뛰어나다며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삼성은 고무됐다. 삼성은 이어 일본 산요전기측과 TV제조만을 위한 개별적 기술제휴를 체결하고 TV 품질 향상에 매진했다. 이런 노력 끝에 71년 1월29일에는 흑백TV 시범생산 2개월 만에 중남미 파나마에 500대를 수출하는 성가를 올렸다. 비록 일본 기술을 빌리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전자공업의 신기원을 연 쾌거라고 삼성측은 평가하고 있다.

삼성산요전기는 71년 들어 테이프리코더의 생산을 시작했고, TV부품인 고압트랜스를 생산해 원가절감을 기했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TV생산시설 1개 라인을 증설해 세트 제품의 생산능력을 향상시켰다. 72년에는 금속공장 설비를 크게 증설해 TV용 금속부품 생산을 추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