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스콜피언스의 ‘변화의 바람(the wind of change)’이란 노래를 아세요?”
삼성전자 러시아 법인에 근무하는 최희중 차장이 옆자리에서 이렇게 말을 건넸다. 지난 15일, 모스크바 최대 전자상가인 가르부쉬까(Garubushyuka)를 향해 가는 길이다. 멜로디가 가물가물했지만 그가 몇마디 들려주자 어렴풋이 기억났다.
“90년대 초 러시아 개혁, 개방 시대에 딱 맞는 노래입니다. 가사중에 모스크바와 고리키 공원도 나오죠”
생각보다 많은 차량, 분주한 사람들로 인해 ‘이곳도 변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창 밖의 잿빛 하늘과 회색빛 건물, 무표정한 사람들을 보니 그리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잠깐 동안이었다. 용산 선인상가와 비슷한 라르부쉬까 매장안에 들어가니 눈이 확 돌아갔다.
빽빽히 들어선 매장, 그곳에서 터져나오는 음악소리, 월요일인데도 많은 손님들. 놀라운 것은 전시된 제품들. 초대형 PDP와 LCD TV, 첨단 홈씨어터시스템, 종류를 헤아리기도 숨찬 휴대폰 들이다. 여기가 과연 사회주의국가인가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주말엔 몸이 부딪칠 정도로 사람들로 붐빈다고 한다. 임대료가 1평방미터당 250달러나 되는 데도 빈 매장은 전혀 없다.
이틀 뒤, 레닌 묘가 있는 붉은 광장 옆의 ‘굼’ 백화점. 100년 넘어 고풍스럽기만 한 이 백화점의 내부는 깔끔하게 단장돼 미국과 유럽의 여느 최고급 쇼핑몰에 못지 않다. 모피를 비롯한 유럽산 최고급 의류와 가방, 공예품이 넘쳐난다. 서민들은 엄두도 못내는 값비싼 제품들이지만 러시아 신흥 부자들의 구매는 거침없다. 트레르스카야 거리 등 중심가 명품 매장들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소비시장이 활짝 열렸다. 90년대말 신용 불량국 러시아는 이제 사라졌다. 4년간 7% 안팎의 경제 성장을 기록하면서 외환보유고 세계 8위에 올랐고, 실업률도 한자리수로 떨어졌다. 특히 유가가 급등하면서 세계 최대 산유국 러시아 국민들의 지갑도 풍성해졌다. 중산층이 급증했다.투자가 적다보니 고스란히 소비로 이어졌다. 예술가의 거리 아르바뜨 옆에 새로 난 새 아르바뜨 대로 옆엔 대형 카지노 여럿이 성업중이다.
수혜주는 외국 전자업체들이다. 2002년 61억 달러였던 러시아 전자시장(컴퓨터 제외)이 이듬해 70∼80억 달러로 커졌다. 올해도 30% 이상의 성장세가 점쳐졌다.
IT시장도 본격적으로 커질 전망이다. 집권 2기를 맞은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의 넘쳐나는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바꾸기 위해 투자 확대를 적극 유도하기 때문이다. 특히 IT산업 육성에 소매를 걷었다. 온라인 과세체계 마련, 각급 학교 컴퓨터 보급,IT산업 법률 체계 정비 등을 골자로 한 ‘e-러시아’프로그램을 중앙 및 지방 정부가 앞다퉈 추진중이다.
러시아 IT시장의 밝은 전망은 급증하는 휴대폰 수요가 바로미터다. 올해 2000만대를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휴대폰 판매는 내년에 2700만대 이상으로 커질 전망이다. 이것도 보수적으로 잡았을 때의 수치다.
모스크바와 뻬쩨르부르크 등 대도시의 경우 벌써 대체 수요가 생길 정도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 LG전자 등 국내 전자업체들은 물론 팬택 등 전문업체들도 러시아를 중국 다음의 전략시장으로 삼고 시장 개척에 매진했다.
문제는 시장 공략이 그리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 나라 휴대폰 시장은 완전한 경쟁 시장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휴대폰 구입에 사업자의 입김이 거의 작용하지 않는다. 러시아 소비자들은 휴대폰을 산 다음 서비스사업자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유통업체들의 입김도 세다. 제조업체에 직접 구매해다가 전국 도소매점에 공급하는 전문하는 딜러가 테크마켓,멕서스,딕시스,유로셋,베타링크,아나리온 등 10여개를 헤아린다. 윙스,세브렌 등 전국적인 판매망을 갖춘 대형 도매업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현금 회전율을 높이기 위해 잘 팔리는 제품 위주로 구매한다. 휴대폰업체로선 적절한 시점에 소비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제품을 끊임없이 내놓아야 한다.
러시아 유통업체들은 지속적으로 거래하다가도 품질이든 소비자 반응이든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구매를 딱 끊는다. 상반기엔 업계 1, 2위 수준으로 팔다가 하반기엔 10위권 밖으로 밀려나기도 하는 일이 발생하는 게 러시아 시장이다.
더욱이 러시아엔 노키아,모토로라,삼성전자,소니에릭슨 등 유수 업체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휴대폰 업체들이 거의 다 진출했다. 국내 모 종합상사까지 진출할 정도다. 하루하루 실적을 체크해야 할 정도로 급변하는 유통환경 속에서 피말리는 싸움을 벌일 수 밖에 없다. 특히 브랜드 지명도가 떨어지는 후발업체로선 어려움이 클 수 밖에 없다. 일부 유통상들은 마이너 휴대폰 업체에겐 구입 대금을 판매후에 지불하기도 한다.
팬택은 뒤늦게 진출해 성공한 케이스. 올초 신제품을 출시할 때만해도 수백대 팔기도 쉽지 않았지만 지난 3분기엔 15만대로 급증해 삼성,LG에 이어 한국 제품의 입지를 단단히 다졌다.
이 회사의 러시아지사장을 맡은 정상민 상무는 “처음엔 딜러들이 만나주지도 않았지만 직원들이 몸으로 부딪치는 영업으로 제품을 보여줬고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사정이 나아졌다”라면서 “소비자 반응을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시장이어서 철저한 준비와 노력이 없으면 전혀 승산이 없다”라고 말했다.
러시아 시장에선 브랜드 지명도가 매우 중요하다. 뒤늦게 자본주의 맛을 보면서 졸부가 많이 생겨서인지 명품 브랜드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국내의 많은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을 공략했지만 삼성,LG 등 극히 일부 기업만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브랜드 장벽이 높이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도 확보한 브랜드 지명도를 유지하기 위해 미디어 및 옥외 광고 등에 막대한 물량을 쏟아붓고 있다. 전문업체의 핸디캡을 가진 팬택도 만들기 위해 고급브랜드 이미지를 심는데 집중했다.
다행히 국내 기업은 지역 주민 상대의 콘서트, 축제, 마라톤 등과 문화행사 지원 등 지역 밀착형 마케팅 활동과 고급 위주의 제품 판매를 통해 우리 기업의 이미지를 ‘도움을 주는 기업’과 ‘첨단 기술을 가진 기업’의 이미지를 심어놓았다. 이러한 기반을 극대화하려면 e러시아 프로그램의 한 축인 전자정부 프로젝트와 통신 인프라 개선 작업에 우리 기업들이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하면 떠오르는 보드카. 자본주의 물결을 타고 부를 거머쥔 30대 신흥부자들은 다음날 일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보드카 대신 와인을 마신다. ‘부익빈 빈익빈’인 벌써 사회문제화한 나라. 변화하는 러시아의 물결을 우리 기업들이 어떻게 잘 탈 것인가. 어둠이 깔리자 하나둘 조명이 켜지면서 점차 라스베이거스로 바뀌어가는 모스크바의 신아르바뜨거리에서 우리 기업인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갔다.
모스크바= 신화수기자@전자신문, hsshin@
[인터뷰]장창덕 삼성전자 CIS법인장
“여기에선 배불뚝이(CRT) TV가 안 팔립니다. 첨단 제품이 아니면 안 통하는 시장이죠. 처음부터 고급 제품으로 제대로 승부하지 않고선 성장할 수 없습니다”
장창덕 삼성전자 CIS법인장은 “양적인 성장이 벌써 한계에 도달했으며 품질과 디자인, 그리고 브랜드로 경쟁하는 시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모스크바 등 대도시에선 휴대폰도 벌써 대체수요가 이끈다. 세탁기 등 가전제품도 고급 제품으로 교체하는 단계다.
장창덕 부사장은 러시아 시장의 잠재력에 대해 “여긴 돈이 돈다”라는 한마디로 압축했다. 오일달러가 풍부해지면서 러시아인의 소비 욕구가 폭발적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자는 러시아에 휴대폰, 컴퓨터, 모니터, 프린터 등의 IT제품을 집중적으로 내놓아 IT기업의 이미지를 확고히 심어놨다. 특히 올해 휴대폰 시장에서 매출액은 물론 판매량에서 1위를 차지했다. 국내기업으론 유일하게 ‘올해의 브랜드상’도 수상했다.
삼성전자는 이러한 성과도 의미 있지만 브랜드지명도에서 올해 처음 소니를 누른 것을 더욱 값어치 있게 본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브랜드에 대한 집착이 큰 나라에서 이룬 것이라 더욱 의미있다.
어려운 점은 없을까. 장 부사장은 “휴대폰의 경우 현지 생산이 어려운 게 문제인데 최근 푸틴정부가 각종 규제를 대폭 완화할 방침이어서 언젠가는 해결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러시아를 전략시장으로 키우려는 삼성전자는 이곳에 맞는 연구개발(R&D)을 강화하기 위해 연내 인력을 대거 확충할 계획이다. 특히 소프트웨어,광학,박막 기술 등 이 나라의 기초과학 능력을 접목시키는 노력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현지 법인도 단순한 마케팅 활동을 넘어 양국의 기술을 교류하는 창구로 바뀌고 있다.
“결국 품질과 디자인과 같이 제품력으로 승부하는 게 정도입니다. 지금까지 이룬 것에 만족치 않고 러시아 국민에게 더욱 다가가는 기업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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