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한 지 3년 만에 코스닥에 등록해서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김아무개 사장을 만났다. 회사의 미래를 이야기할 때면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던 초롱초롱했던 눈은 간 곳없고 거칠어진 얼굴에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이는, 말 그대로 초로의 지친 사나이 모습이었다. 100여명이 넘는 직원을 이끌고 험난한 고비를 여러번 넘겨온 역전의 용사같은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몇 잔의 술이 오고 난 뒤에, 은퇴를 고려 중이라고 고민의 한 자락을 펼쳤다. 함께 어려운 길을 헤쳐 왔던 몇몇 핵심 인력은 우리사주를 매각하고 코스닥 등록을 준비 중인 다른 회사로 옮겼다. 등록하면서 받은 공모 자금으로 현금 사정이 넉넉해지자 임금 인상 요구가 거세지고, 복리후생 비용은 늘어갔다. 주가를 부양하라는 소액주주들의 날선 목소리에 하루를 시작하는 날이 많아졌다. 자사주 매입이라는 방법으로 몇 번 주가를 부양했으나 결국 제자리로 돌아갔고, 회사에는 평가 손실로 처리되어 주가는 더 떨어졌다. 매출은 정체 상태인데 회사의 돈줄 역할을 할 수 있는 아이템이 눈에 보이지 않아 마치 짙은 안개 속에서 보이지 않는 깃대를 향해 공을 날리는 기분이라고 했다.
깊은 밤 집에서 혼자 술잔을 잡는 날이 많아졌다. 지난 몇 년동안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앞만 보고 죽어라 달려왔는지, 가족과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은 고민이 생겼다. 느리게 사는 삶이나 후반부 인생을 새롭게 사는 방법과 같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회사 지분을 매각하고 남은 인생을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나를 만난 이유는 우회 등록이나 M&A에 관심이 있는 대상을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대주주 지분을 매각해서 수십억을 은행에 예금하고, 남은 인생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느리게 즐기면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김사장과의 씁쓸한 만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생각난 노래가 있었다. 양희은이 불렀던“봉우리”라는 노래다. ‘어릴적 산에 올랐는데, 눈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인 줄 알고 그 봉우리에 오르려 노력했다. 봉우리에 올라 그늘에 누워 잠도 자고, 나무 등걸에 기대어 휴식을 취할 기대감에 부풀어 앞만 보고 올랐다. 그러나 올라가서 본 것은 그저 고갯마루에 불과한 작은 봉우리였다.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겹겹이 늘어선 다른 웅장한 봉우리들이었다.’ 대충 이런 가사를 가진 노래다.
노래는 새로운 희망을 들려주지만 김사장은 작은 고개마루에 불과한 봉우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봉우리를 향해 출발할 때 함께했던 동료들은 맛있게 점심 식사를 했으니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했고, 어떤 동료들은 다른 팀에서는 더 맛있는 저녁식사를 준다며 떠나버렸다. 옆에 있던 다른 동료는 우리가 왜 더 높은 봉우리를 향해 가야하느냐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봉우리를 올라가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느냐고. 여기서도 멀리 바다를 볼 수 있고, 산허리를 휘감아 두른 단풍을 볼 수 있는데, 더 높은 봉우리에 올라갈 이유가 무엇인지. 아랫 마을에 사는 사람들처럼 편안하게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면서 먼 곳에서 봉우리를 감상하면 될 일이지, 가족들과 헤어져 팍팍한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 과연 제대로 인생을 즐기는 것인가? 김사장은 그 질문에 발목을 잡혀 아랫 마을로 내려가 산책하며 자연을 즐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런 문제는 김사장과 김사장 회사 직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랜 고생 끝에 코스닥에 등록한 많은 기업들에게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문제다. 김사장보다 한발 먼저 결정을 내리고 산을 내려간 사장들이 많고, 제2의 인생을 살겠다며 김사장과 같은 준비를 하고 있는 몇몇 사장도 있다.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코스닥 등록’을 자신이 올라가야 할 가장 높은 봉우리로 설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투자를 받기 위해서 벤처 사업가들이 작성하는 사업계획서를 보면 대부분이 코스닥 등록을 목표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회사의 장기 비전보다는 3년 ~ 5년 사이에 코스닥에 등록하겠다는 것이다. 코스닥 등록 이후의 회사 그림은 찾아볼 수 없다. 일단 등록이 최우선이고 이후의 문제는 회사의 성장과정에 맞게 전략을 설정하겠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고 죽듯이, 모든 상품이나 기업에게도 라이프 사이클이 있다. 코스닥 등록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비유하면 성장기의 초중반 과정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 기업의 가장 화려한 전성기에 주어지는 상이나 영예가 아닌, 이제 갓 제 힘으로 일어서서 사업할 수 있는 기업에게 주어지는 시장 참가증이다. 수십년 동안 연기 생활을 통해 대중에게 기쁨을 줬다는 사유로 받게 되는 평생공로상이 아니라 이제 막 연기에 눈을 떠서 독자적인 자기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배우에게 수상되는 신인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위대한 배우가 되고자 꿈꾸는 사람이 신인 연기상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는 성공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벤처비즈니스에 뛰어든 사람이 코스닥 등록을 일생 일대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된다.
80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에 오르기 위해서 5000미터 부근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한다. 코스닥 등록은 8000미터를 오르기 위한 베이스캠프 설치와 같다. 정상을 공격하기 위해 물자와 사람을 운반하고 공격 루트를 재정비하는 절차인 것이다. 정상 등정에 가장 필요한 것은 베이스캠프부터 정상까지 다양한 등정 루트를 그리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지, 베이스 캠프를 화려하게 설치하고 그 캠프에 눌러 앉아 물자를 소비하거나, 등정 루트를 찾는데 모든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니다. 베이스 캠프는 당신이 오르고자 하는 그 봉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또 다른 이유는 ‘코스닥 등록’을 도박판의 잭팟이나 로또 당첨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개인적인 즐거움을 포기하거나 가정을 등한시하면서 코스닥 등록을 목표로 열심히 일해온 사람들에게 코스닥 등록은 커다란 보상이다. 그들에게 있어 코스닥 등록은 그동안의 고생과 서러움을 보상해주는 화려한‘돈 잔치판’이다.
처음 창업 원금이나 투자금의 수십배 수백배 이익이 눈앞에 실현된다. 대주주의 경우 최소한 수십억원에서 일천억원이 넘는 돈방석에 앉게 된다. 지난해 말에 등록한 모기업의 대주주는 등록 첫날 1600억원대의 자산가로 화려하게 올라섰다. 처음부터 함께 고생한 임직원들이라면 최소 10억의 자산이 생긴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이익이지만 숫자가 주는 매력은 대단하다. 이런 잔치가 수없이 매체를 통해서 발표되면서 벤처 업계 종사자나 벤처를 꿈꾸는 사람 모두 다 환상을 갖게 된다. 불꽃처럼 빛나는 돈 잔치에 대한 환상.
그러나 잔치가 끝난 다음에 남는 것은 허탈한 설거지다. 강원랜드에서 잭팟을 터트린 사람은 도박에 중독되어 다음번 잭팟을 기대하면서 그동안 벌어들인 돈을 그대로 기계에 쏟아 붓는다. 결국에는 모든 돈을 허비하고 도박장 주변을 떠돌거나 돈따는 법을 가르쳐 준다면서 새로운 진입자들을 대상으로 카운슬링을 한다. 로또에 당첨된 이후에 묵묵히 그동안 해왔던 생업에 종사한다는 사람 별로 보질 못했다. 연례행사처럼 열리는 잔치라면 다음번 잔치를 기대하면서 일 할 수도 있지만 ‘코스닥 등록’이라는 잔치는 한번 밖에 없는 잔치다. 다음번 잔치에 대한 기약은 없다. 기약없는 잔치가 끝난 뒤 사람들은 방향을 잃고 일을 해야할 원동력을 잃어 버린다. 우리집 잔치에서 배불리 못 먹은 사람들은 새로운 잔치를 찾아 떠나기도 한다.
수많은 기업들이 스폿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하게 코스닥에 입성하지만, 상당수 기업들이 채 3년이 지나지 않아 관리종목으로 지정되거나 시장에서 퇴출당하고 있다. 1999년과 2000년 초에 신문 지면을 장식했던 스타 기업들 중에서 현재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업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다 못해 코스닥 등록 바로 전년도 매출액이나 손익을 채우는 기업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다.
산봉우리에 주저앉아 내려갈 생각을 하거나 그 자리에 돗자리 펴놓고 잔치를 벌이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벤처 비즈니스의 미래는 암담하다. 지금도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힘든 걸음을 떼고 있는 많은 후배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지금 앉아서 쉬고 있거나 갈 길 몰라 방황하고 있는 자리는 ‘그 봉우리’가 아니다. 신발 끈을 다시 조여매고 팍팍한 산길을 향해 다시 힘찬 걸음을 내딛기를 바란다.
◆ 조명환은
철학을 전공하고 신학과 영화를 따로 공부함. 요즈음에는 미술사에 푹 빠져 열심히 그림 보러 다니고 있음. 광고대행사 AE로 밥벌이를 시작했고, 조선일보, 디지틀조선일보, 한겨레신문사를 거쳐 1999년부터 벤처캐피탈에 몸담고 있음. 현재 C&L벤처투자의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음.
◆ 조명환의 "벤처 동네 사람들"
벤처 동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 다양한 사람들이 많은 만큼 이야기도 많다.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신화같은 이야기부터 대폿집 안주거리 같은 가십거리도 있다. 다른 동네 사는 사람들에게 벤처 동네는 부러움의 대상이자 질시의 대상이기도 하며, 꿈의 엘도라도이자 핏발 선 눈으로 가득 찬 투전판이기도 하다. 서로에게 다른 동네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담담하게, 때로는 핏대 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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