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연구단지 탄생 30주년을 맞아 연구단지 연구원들의 모임인 대덕클럽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그동안 대덕연구단지에서 창출한 부가가치가 168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에서 단연 1위를 차지한 것은 초고집적 D램 반도체다. 이를 통해 창출한 부가가치만도 무려 107조원이 넘는다.
최근 이와 같은 부를 창출한 대덕연구단지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연구소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반도체·원천기술연구소가 폐지될 것이라는 보도가 있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보도된 바에 의하면, ‘이미 반도체 분야에서 일정 정도의 성과를 달성해 존립 의의가 희박해졌기 때문’에 폐지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정 성과를 달성해 존립 의의가 희박해 폐지하겠다’는 이유는 구차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이다. 세계적인 명성을 갖는 영국 케임브리지의 카벤디쉬 연구소나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를 보라. 이들 기관도 1세기라는 긴 세월을 헤쳐오면서 ‘일정 정도의 성과를 달성해 존립 의의가 희박’해지는 위기 상황을 여러 차례 겪었지만 오늘날까지 꿋꿋하게 세계 제일의 연구소로 남아 있다.
카벤디쉬와 막스 플랑크가 오랜기간 명성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그런 위기상황 때마다 그 시대를 선도하는 새로운 아이템을 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들 연구소가 초기에 쌓아올린 업적과 명성이 뒷받침되어 마치 ‘블랙홀’처럼 끊임없이 유능한 인재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ETRI 반도체·원천기술연구소는 사반세기의 결코 짧지 않은 연륜과 100조원이 넘는 부를 창출했다는 신화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연구소다. 같은 말이라도 ‘아’다르고 ‘어’다르다. 그런데도 폐지 운운하는 것은 성급하기 그지없다. 전통과 명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한 몰상식에 다름 아니다.
지금 누군가가 대덕연구단지 과학기술자들의 보람과 자긍심을 여지없이 짓밟을 수도 있는 일을 아무 생각없이 자행하려 하고 있다. 현재의 이공계 위기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도 어찌보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찰’에 눈이 멀어 사기·긍지·자존심 등 돈으로 그 가치를 계산하기 어려운 무형적 자산의 소중함을 짓밟아버리는 무지한 정책 입안자들의 횡포 탓이다.
무형의 자산을 고려하지 못하는 과학기술정책은 사실 정책이라 할 수 없다. 미국의 전쟁영웅 맥아더는 ‘노병은 죽지 않고 단지 사라질 뿐’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은퇴했다. 연륜있는 연구소 또한 그래야 마땅하다.
◆ 맹성렬 ETRI 선임연구원 slm221@etr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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