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연구개발의 큰 축인 기업 부설연구소 설립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00년 5000개를 돌파한 기업 부설연구소가 불과 2년만인 올해 말이면 1만개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회장 강신호)에 따르면 기업 부설연구소는 지난 81년 당시 과학기술처가 처음으로 46개의 기업 연구소를 인정한 이래 83년 100개, 88년 500개, 91년 1000개를 넘어서면서 설립이 급증, 7월 현재 9838개에 달한다. 연구소 설립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연구소 등록이 취소되는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올 들어 월 100개 정도의 기업 연구소가 신규로 설립돼 오는 12월에는 기업 연구소 1만개 시대를 맞이하게 될 전망이다.
이같은 국내 기업 연구소의 규모는 우리나라보다 국내총생산(GDP)이 25배나 높은 미국이 3만5000개 정도인 점을 감안하며 외형상 우리나라의 기업 연구소는 가히 세계적 수준이라고 할 만하다. 기업 연구소의 폭증과 함께 연구소를 움직이는 두뇌인 연구인력 역시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국가경쟁력 향상에 한몫하고 있다.
산업기술진흥협회에 따르면 기업 연구소의 연구인력은 지난 86년 1만명에서 95년 5만명을 거쳐 올 연말에는 13만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민간기업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우리나라 기술개발의 핵심 주체로 단단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기업 연구원의 수적인 증가와 더불어 기업들의 연구개발 투자도 크게 늘어나 2000년 연구개발 투자 규모가 10조원을 초과한 데 이어 올 연말에는 13조9000억원을 형성할 전망이다. 특히 IT업체들의 인력 증가와 연구개발 투자가 타 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발해 눈길을 끌고 있는데 기업 연구소 중 IT관련 기업 부설연구소가 전체의 60% 정도인 5900여개에 달하고 있다. 이는 2002년 현재 2만개 정도(정보통신산업협회 자료)로 추정되는 국내 IT업체 3∼4곳 중 한 곳이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전문가들은 기업 부설연구원과 연구소의 양적 증가에 대해 “중소기업 특히 벤처기업들의 연구소 설립이 늘어나 인력이 대폭 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 지난 2∼3년 사이 생긴 벤처업체들은 대부분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는 기술력을 생명으로 하는 벤처기업들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로 보여지는데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를 보더라도 벤처기업의 경우 9.27%(2001년 기준)로 기업 평균 3.55%를 상회하고 있다.
급변하는 기술환경에서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미래 발전을 위한 전략적인 연구개발 투자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같은 기업 부설연구소와 연구원의 양적 성장은 큰 의미를 갖는다. 특히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 벤처기업의 연구개발 투자가 늘어나면서 동시에 인력이 많아진 것은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을 한단계 끌어올리는데 일정 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중소기업 연구소 중에는 대기업이 담당하기 어려운 1개 분야에 집중 투자해 기술력을 축적, 해당 부문에서 세계적인 기술로 인정받는 소규모 연구집단들이 서서히 늘어나고 있어 더욱 고무적이다. 하지만 단순한 양적 증가가 질적 전환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데서 우리의 고민이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의 기업 연구소가 외형적인 성장에 치중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아직도 세계적인 고급 두뇌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기업 연구소의 인원 증가가 사람이 우선이라는 기업들의 인식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연구소 설립을 통해 병역특례나 세제 지원 등 정부로부터 얻는 여러가지 제도적 혜택만을 노린
‘허수’가 많다고 언급하고 있다.
IT벤처업체 한 관계자는 “일부 벤처업체들의 경우 연구소를 설립할 여건이 안됨에도 불구하고 기획이나 마케팅 직원까지 연구원으로 등록해가며 연구소를 만들고 있다”고 꼬집으며“이는 연구소로 등록할 때 병역특례를 통해 인력을 확보할 수 있고 또 여러가지 자금지원이나 세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이점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인진기자 ijin@etnews.co.kr>
◆기업연구소 폭증 이유
기업 부설연구소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이제 기업 부설연구소를 빼놓고는 우리나라의 연구개발을 말할 수 없게 됐다.
기업 연구소의 양적 팽창 원인으로 관계자들은 연구개발에 대한 기업들의 인식 변화를 꼽는다. 기업 대부분이 장기적인 안목에서 미래 발전을 위한 연구개발의 투자 없이는 생존이 힘들다고 느끼고 있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의 설문조사 결과(2002년 7월)에 따르면 기업 최고 경영자들의 기업경영전략상 최우선 관심분야가 ‘연구개발활동 강화를 통한 기술력 제고(39.2%)’로 나타났을 정도다. 이는 IMF 이전 ‘생산성 제고 및 품질 향상’이 32.9%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과 비교되는 결과다. IMF 이후 지식경영, 기술경쟁이 가속화되는 환경에서 주력사업 및 신규사업 창출을 위해 연구개발력 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확산됐음을 의미한다. 특히 기술집약형 기업인 벤처기업들의 경우 창업과 동시에 연구소를 함께 만드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 연구소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정부의 벤처기업 육성책과 맞물려 있어 양적 성장을 질적 성장과 등치시키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즉 연구개발을 중시하는 기업들의 인식 변화로 기업 연구소 설립이 늘어나기도 했지만 기업연구소의 증가는 연구소 설립 조건을 완화한 정부 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민간 연구소는 연구전담 인력이 5명에서 10명 이내로 소규모 형태다. 5∼10명 정도의 인원과 일정 정도의 연구소 공간만 있으면 어떤 기업이든 연구소로 등록할 수 있다. 이처럼 설립이 어렵지 않은데다 연구소로 등록할 경우 정부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어 자금이나 인력이 부족한 벤처업체들은 특히 연구소 설립에 적극적이다. 기업연구소가 90년대 중반 이후 벤처붐과 함께 급격하게 늘어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정부는 기업이 연구소를 등록할 경우 우선 병역특례 제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인력을 지원한다. 벤처업체 한 관계자는 “대기업에 비해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기 힘든 상황에서 병역특례 제도는 매력적”이라며 말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일부 벤처업체들의 경우 연구소를 만들거나 유지할 만한 능력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획이나 마케팅 인력까지 연구원으로 등록하는 편법을 써가면서 무리하게 연구소를 설립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1만개의 기업 연구소가 모두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기 힘든 이유다. 실제로 상당수 벤처기업 연구소가 장기적인 연구개발보다는 그때 그때 기업이 수행하는 프로젝트에 동원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병역특례를 통한 인력지원 이외에도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을 경우 연구 및 인력개발비의 일정률을 법인세(또는 소득세)에서 공제해 주는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산업기반기술 개발사업 등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각종 개발사업에 참여할 때도 유리하다.
<김인진기자 ijin@etnews.co.kr>
◆인터뷰/산업기술진흥협회 장경철 부회장(사진은 손으로 전달)
“올 연말이면 기업 연구소가 1만개에 달할 전망입니다. IT기업만을 두고 보자면 기업 3∼4곳 중 한곳은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이제 양적인 성장이 웬만큼 이루어졌으니 고급 두뇌 양성 등 질적인 성장을 논의해야 할 시기라고 봅니다.”
기업연구소 인가업무를 주관하고 있는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장경철 부회장은 “정부의 벤처기업 육성책과 함께 90년대 후반 이후 세계 시장의 경쟁 가속화로 기업 스스로 연구개발의 중요성에 눈을 뜬 결과”라고 기업연구소와 연구원의 급증 원인을 찾았다.
장 부회장은 “양적인 성장만큼 질적인 성장을 유도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며 “특히 대기업에 비해 자금이나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의 연구개발 의욕을 북돋워주는 방향으로 정책이 확대되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 부회장은 과학기술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기업연구소 클러스터 사업 등이 이같은 민간기업 연구소의 내실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연구소 육성정책에 따라 민간연구소 1만개에 달하는 등 양적인 혁신 기반은 갖추었지만 전체의 41.5%인 4078개 연구소가 5인 이하 규모로 체계적인 기술개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에따라 과학기술부는 산업기술진흥협회에 ‘클러스터지원단’을 설치, 기술분야별 혹은 품목별로 동질성을 지닌 중소기업 연구소들을 한데 묶어 기업간 기술정보교류, 공통 애로기술 발굴과 연구개발을 공동으로 추진하게 할 계획입니다. 올해 일단 5∼10개 정도의 클러스터를 구성, 지원한 후 매년 확대 시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장 부회장은 정부가 나서서 기업의 연구개발을 활성화하는 이외에 기업 나름대로의 노력도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여러가지 조사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기업들의 기술개발에 대한 의욕은 분명히 높습니다. 하지만 일부 기업들은 인력이나 세제 혜택 등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 연구소를 형식적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중소업체들의 경우 연구예산이나 인력이 절대 부족하거나 연구관리나 운영 등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 부회장은 “중소기업들은 연구개발투자 예산을 적기에 확보할 수 있는 시스템 정착 및 외부 아웃소싱 기술의 효율적 활용, 우수 연구인력의 이동을 막기 위한 인센티브제 등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김인진기자 ij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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