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2-디지털문화 대혁명>새로운 공동체 문화-사이버 커뮤니티

금요일 밤 10시.

A는 어김없이 회사 컴퓨터를 켜고 채팅에 열중한다. A는 한 포털사이트에서 개설중인 커뮤니티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A는 학창시절 꿈이었던 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컬트무비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금요일 밤 10시는 이 동호회의 실시간 채팅이 있는 시간이다.

A의 ID는 「컬티」.

자신의 해박한 영화지식을 뽐내며 동호회에서 가장 인기있는 회원으로 꼽히는 A는 특히 채팅을 통해 많은 사이버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이 동호회에서 A의 정체는 단지 「컬티」일 뿐이다. 아무도 A가 평범한 가정을 둔 회사원이라는 사실을, 지금은 날개를 접은 영화지망생이었다는 사실도 모른다. A는 이것이 더 마음에 든다. 생활에 쫓겨 결혼후 아내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던 영화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이곳에서는 아무런 제약없이 펼칠 수 있다. 동호회 회원이 늘어가며 더욱 활성화할수록 A는 희열을 느낀다.

최고의 인기 영화논객 「컬티」. 오늘은 몇몇 관심있는 회원들을 중심으로 그가 제안한 단편영화 제작 모임의 첫 오프라인 만남 일정을 정하는 날이다.

각자의 일정을 맞춰보니 역시 만남은 토요일인 내일로 정해졌다.

A가 오프라인 만남이 선뜻 내키지 않으면서도 내일을 기다리는 것은 「컬티」의 가장 열성적인 여성 팬인 「젤소미나」를 직접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젤소미나」는 프랑스 영화의 열광적인 팬이다. 누벨바그와 누벨이마주에 정통한 「젤소미나」는 최근 컬트무비에 관심을 돌리며 「컬티」의 열렬한 팬이 됐다. 「젤소미나」는 학창시절 매주 프랑스 문화원을 드나들며 영화에 몰입했다고 한다. 학교 졸업 후 프랑스로 영화 유학을 꿈꿨던 그녀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그 꿈을 접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고 있다. 자신의 생활에 대해 더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지만 남편과 통하지 않는 영화 얘기를 「컬티」와는 마음껏 할 수 있고 많은 지식을 배울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A 역시 「젤소미나」와의 대화가 즐겁다. 예전 자신에게 영화 얘기를 들으려고 따라다녔던 후배들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긴다. 매번 「젤소미나」는 A를 어느새 학창시절로 돌아가게 만든다.

A는 「젤소미나」와 만남을 꿈꾸며 설레이는 금요일 밤을 보낸다.

토요일 아침 A는 아내에게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을 만난다며 늦을 거라 둘러댄다. A의 발걸음은 가볍다. 아내 역시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고 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니 늦어도 좋다는 말을 남기며 이해심 넓은 남편의 아량까지 보여주고 출근길에 나선다.

회사를 마치고 저녁 7시. 컬트무비 동호회 단편영화 제작 모임 첫 만남 장소는 홍대 앞 카페 「뽕네프」.

좀 늦어 바쁜 걸음으로 A는 뽕네프를 향해 걸어간다. 뽕네프의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를 둘러보는 A. 저 멀리 창가에 열명 남짓 모여있는 자리로 눈길이 멈춘다.

머뭇거림 없이 A는 그 자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다.

『여기가 컬트동호회죠? 저는 「컬티」라고 합니다.』

좌중을 한번 둘러본 A의 시선은 끝자리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혼자뿐인 여성에 이르러 멈춘다. 그녀가 분명 「젤소미나」.

A가 그녀 앞에 자리를 잡자 그제서야 「젤소미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천천히 든다.

「젤소미나」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A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따라진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A가 그리도 보고싶어했던 「젤소미나」는 다름아닌 A의 아내였던 것이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에겐 어느새 익숙한 용어로 자리잡은 「사이버 커뮤니티」. 온라인과 익명을 전제로 시작된 사이버 커뮤니티는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진화됐으며, 오프라인의 모임이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단계로까지 접어들었다.

관심사를 중심으로 철저한 익명을 통해 온라인에서만 운영되던 동호회가 이제는 오프라인 모임이 정기화되는 추세며, 동문회·동창회·동기회 등 각종 오프라인

모임이 이제는 온라인 모임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 있는 친구나 동창회 나가기를 꺼리는 주부들까지 이제는 모두 온라인으로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됐으며, 주말이면 유흥가 여기저기서 「번개」라는 이름의 오프라인 모임으로 들썩인다.

국내에 사이버 커뮤니티를 퍼트린 다음커뮤니케이션(대표 이재웅 http://www.daum.net)의 「다음카페」에서부터 여기에 불을 당긴 「아이러브스쿨(대표 김영삼 http://www.iloveschool.co.kr)」까지 사람들이 모이면 빠지지 않는 화젯거리다.

이렇게 사이버 커뮤니티는 우리 생활에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시공을 초월해 공통된 관심사만 있다면 멀리 있는 외국인과도 실시간 채팅이 가능해졌고 그들의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수입이 금지됐던 일본문화까지 개방 전에 이미 인터넷을 통해 우리 생활 속에 스며들어 일본문화 관련 사이버 동호회가 유행하기도 했다.

사이버 커뮤니티는 온오프라인이 연동되면서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됐다. 시간·장소·나이·국경·문화까지.

현재 이러한 사이버 커뮤니티의 모습이 앞으로는 어떠한 모습으로 전개될 것인

지 여기에 확실한 답을 주는 사람은 없다.

인터넷 문화가 어떻게 발전할 것이며 또한 어떠한 매체가 다시 우리 문화를 지배할 것인지 섣불리 대답하기 힘든 것은 문명 변화의 속도가 진단하기 힘들 정도

로 빠르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30∼40년 전 SF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현재의 모습은 최첨단 소재의 우주복

과 하늘을 나는 자동차, 괴물 로봇 등의 기계문명으로만 묘사되었을 뿐 지금의 인터넷이라는 괴물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유병수기자 bjor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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