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가전제품과 PC·통신기기 등의 구분은 물론 통신망과 방송망의 구분도 없어지는 디지털융합(Digital Convergence) 현상이 일고 있다.
그동안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동일한 목표를 겨냥해 각기 다른 분야에서 발전을 거듭해온 전자제품들이 디지털 기술과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 및 다양한 뉴미디어의 출현에 힘입어 드디어 하나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곧 그동안 인류가 꿈꿔온 일들이 현실화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많은 기대를 갖게 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국내외 시장에는 단순한 기능을 다양화한 복합기능 제품에서부터 PC 및 인터넷과 결합한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복합제품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 생활전자박람회(CES 2000)에는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가전과 컴퓨터 및 통신을 하나로 융합시킨 복합제품들이 대거 전시됐다.
또 최근 들어 국내 시장에는 인터넷TV를 비롯해 인터넷냉장고와 인터넷전자레인지 및 MP3기능을 내장한 오디오와 이동통신 단말기, PC 및 인터넷기능을 갖춘 휴대형 단말기 등 각양각색의 복합형 제품들이 출시되는 등 복합화 현상이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디지털융합 현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제품으로는 최근 국내에서도 초미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인터넷TV와 디지털TV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인터넷TV는 PC의 기능을 일부 수용하고 네트워크망을 통해 인터넷과 연결함으로써 TV의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한층 강화하는 동시에 전자상거래를 가능케 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멀티미디어 정보를 수용할 수 있게 했다.
디지털TV도 아직은 화질과 음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정도지만 조만간 PC 및 인터넷과 연계해 양방향 통신이 가능한 양방향 디지털TV로 발전하고 여기에 홈네트워킹 기술까지 접목시킴으로써 홈서버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TV가 PC 및 인터넷을 하나로 통합됨으로써 「바보상자」라는 그동안의 오명을 벗고 정보사회의 중심축이 되는 종합 멀티미디어 기기로 재탄생한 것이다.
아직은 저작권 문제에 얽혀 크게 성장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향후 전세계 오디오 시장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MP3도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PC와 인터넷의 영역을 넘나드는 제품 가운데 하나다.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이들 복합형 제품은 기존 제품들이 형성해온 것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전자상거래인 「e커머스」나 TV를 통한 「T커머스」, 이동통신 단말기를 이용한 「m커머스」 등이 그것이다.
「온라인 시장」이라고도 불리는 이들 시장은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한 네트워크 기술이 최근 들어 급속히 발전해 나가면서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특히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과 고속랜 등 Mbps급 용량의 전송속도를 지닌 초고속 전송망 구축이 늘어나는 등 네트워크화가 급진전되면서 인터넷 사용자가 크게 늘어 세계를 하나로 묶는 거대한 규모의 사이버 공간이 만들어지고 이는 또 그동안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다양한 종류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생성시키고 있다.
인터넷TV와 디지털TV를 중심으로 한 이들 복합형 제품은 건설·금융·유통·교육·게임 등 전 산업분야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되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 산업구조의 틀을 바꿔나가고 있다.
최근 들어 IT 및 소프트웨어 업체와 방송사·인터넷기업 등 다양한 분야의 업체들이 서로 전략적 제휴를 맺거나 아예 하나로 통합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워낙 다양한 분야의 산업이 하나로 융합되다보니 각각의 전문분야를 책임질 동반자가 필요해지고 또 이같은 제휴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높여야만 서로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협력의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융합 시대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 복합형 제품 자체보다는 이를 통해 제공되는 콘텐츠가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한다.
소비자들이 정작 원하는 것은 이들 제품 자체라기보다는 이들 제품을 가지고 즐길 수 있는 볼거리나 들을거리 등이기 때문이다. 네트워크화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있는 것도 바로 이같은 즐길거리가 대부분이다.
특히 케이블방송과 위성방송에 이은 인터넷방송과 디지털방송 등 다양한 뉴미디어의 등장은 엄청난 분량의 콘텐츠를 필요로 하고 있어 앞으로는 영상이나 음악·게임 등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콘텐츠가 TV나 PC 등 하드웨어를 지배할 것이라는 전망을 낳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 95년 취임한 소니의 이데이 사장은 주력 사업방향을 하드웨어에서 콘텐츠로 전환하면서 『세계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하고 있으며 디지털 시대에 콘텐츠를 잡지 못하면 소니의 미래는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최근 인터넷TV 서비스가 본격화되고 아직 시험방송이기는 하지만 디지털방송도 본격화되면서 콘텐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이 많다.
국내 기업들이 디지털경영을 부르짖으며 인터넷 관련 사업을 통합시켜 기존 사업분야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최근 다양한 종류의 복합제품을 속속 출시하고는 있으나 이들 제품도 이용할 콘텐츠를 동시에 제공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대기업이라고 할지라도 혼자서는 방대한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관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출발단계에 있는 유망 벤처기업에 직접 투자하거나 M&A 또는 전략적 제휴를 맺는 경우가 크게 늘고 있다.
재미있게도 제품의 복합화가 결국의 기업까지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복합형 디지털제품은 새로운 산업구조를 만드는 동시에 우리의 삶의 질도 크게 높여줄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복합화 현상이 앞으로는 어떤 형태의 제품을 만들어낼지, 또 우리의 생활상은 어떻게 바뀌게될지 자못 궁금하다.
<김순기기자 soonk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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