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방송법 처리가 또 무산됐다. 이로 인해 지상파 방송은 물론 케이블TV·중계유선사업자·위성방송을 비롯한 방송 관계자들은 허탈감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방송계는 이번 임시국회에서 통합방송법을 처리하지 못하면 가을 정기국회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럴 경우 정부·여당이 내년 총선을 의식해 방송법 처리를 강행하기 힘들 것이라며 이번 임시국회에서 매듭지어 줄 것을 강력히 주문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끝내 불발되고 말았다.
특히 이번 임시국회에서는 당초 방송정책권의 문화관광부 귀속을 주장했던 자민련과 한나라당이 이를 방송위원회에서 관장하는 쪽으로 양보하고, 방송위원회 위원구성 방식도 9명 가운데 2명을 야당에서 추천하는 것으로 여야가 합의하는 등 쟁점으로 여겨졌던 사안들이 하나씩 풀려감에 따라 큰 기대를 갖게 했으나 「KBS의 경영위원회 설치」 건이라고 하는 돌출된 암초를 피하지 못한 채 무산되고 말아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방송 관계자들은 『이번 임시국회가 통합방송법을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무산되는 바람에 통합방송법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됐다』며 허탈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경영위원회 문제를 들고 나와 거의 통과될 뻔했던 통합방송법을 원점으로 돌려놓게 만든 방송사 측을 바라보는 눈길도 곱지 않아 보인다.
여당 내부에서도 공동 여당의 다른 한 축이 KBS 경영위원회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상황이 어려워졌다며 어이없어 하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지난 5년간 숱한 공청회와 세미나를 반복하고 방송사 노조파업 등 험난한 과정을 거쳐 겨우 타협점을 마련했는데 결국은 정치권이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무산됨에 따라 통합방송법의 운명은 말 그대로 예측하기 어렵게 됐다.
일각에서는 또다시 가을 정기국회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정부·여당이 국정감사에 대비하느라 정치적으로 부담이 큰 방송법 처리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데다 내년의 「총선 대비」라는 더 큰 정치일정이 도사리고 있어 이에 묻혀버릴 공산이 크다.
또한 내년으로 넘어가면 현재 상정돼 있는 법안이 자동폐기되기 때문에 다시 법안을 마련해야 하는데,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와 협조과정을 통해 마련될 새 법안의 내용이 지금보다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무리다. 이 때문에 일부 방송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정치권이 통합방송법을 무산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꼬투리를 찾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아무튼 이번 임시국회에서 방송법 통과가 무산됨에 따라 이로 인한 짐은 고스란히 방송계와 관계당국에 떠넘겨지게 됐다.
통합방송법 통과를 전제로 인수합병·협력 등을 통한 대대적인 변신과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해온 케이블TV와 중계유선 사업자들은 사업 추진에 큰 차질을 빚게 됐고, 방송법 통과를 고대하며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 채」 준비만 하다 5년을 허송해온 위성방송 등 새 미디어 추진업체들은 존립 자체가 불투명해지게 됐다.
정부당국 또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통합방송법 통과를 이유로 그간 미뤄놓은 사안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계유선의 SO화 문제와 인천민방 등의 광역화 민원, m·net과 미래산업 등의 신규 채널 승인 요청건 등 민원처리에서부터 방송정책 방향 설정에 이르기까지 숱한 현안들을 「통합방송법 처리」가 임박했다는 이유로 손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당국의 입장에서 곧 새 집을 짓는 판에 군데군데 보수공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난 5년간 통합방송법을 놓고 소모전을 펴는 동안 우리는 미래의 방송 환경에 대비하기는커녕 현재 상황에서 선진외국은 물론 경쟁 상대들에게조차 밀리는 형국에 처하게 됐다.
『사업을 포기하든지, 외국계 위성방송 사업자들처럼 「비법(非法)」적으로 강행하든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왔다』는 사업자들의 볼멘소리와 『이제 더 이상 정부·여당에 기대하지 않겠다』는 기자협회의 성명에는 국회와 정치권의 존재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짙게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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