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46.끝)

에필로그

67년 구(舊)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초대 전산실장 취임 이후 92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부설 시스템공학연구소(SERI) 소장을 그만두기까지 성기수는 25년간을 최고책임자로서 오로지 한곳에서만 보냈다. 이런 재임기록은 우리나라 역대 이공계열 기관장 가운데서는 최고에 해당한다. 앞으로도 이 기록은 깨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60년대 컴퓨터 도입기에서 80년대 도약기에 이르는 동안 우리나라 정보산업 역사의 중심에는 항상 성기수와 그가 이끄는 SERI가 있었다. 25년의 재임 햇수들이 하나씩 더해 이같은 구심력을 이끌어낸 것이었다. 성기수가 평균 재임연수가 2∼3년에 불과한 이공계 출연연구소에서 이처럼 장수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SERI 행정원 출신 강학수(姜鶴秀·연구개발정보센터 기획운영실장)는 탁월한 연구소 경영감각을 꼽고 있다.

 『그는 연구소경영 관리기법을 생이지지(生而知之)인 듯 책임자에 오르게 된 처음부터 마치 수년의 경험을 가진 전문경영가처럼 행사했다. 연구소 최고책임직을 맡으면서부터 약한 듯하면서도 선이 굵고 투박한 듯하면서도 섬세한 그의 경영감각….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란 어렵다. 이것이 곧 그의 경영비법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이것이 비법임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는지도 모른다. 그가 내리는 결정은 곧 법칙이요, 기준이다. 새우가 내리는 고래의 결정이다. 한치의 방향착오나 더 손볼 여지가 없다. 그가 내린 결론은 수년이 지난 후에 되돌아봐도 오차가 없다.』

 성기수의 이같은 경영감각은 그가 재임한 25년 동안 SERI를 우리나라 출연연구소 가운데 자립도가 가장 높은 연구소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나 기관의 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결과적으로는 경영실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 터이다. 91년 안문석(安文錫·고려대 행정학과 교수)이 분석한 「시스템공학연구소 24년 비용효과 분석」이라는 SERI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성기수가 KIST 전산실(SERI의 전신)을 창설한 67년부터 90년 말까지 24년 동안 SERI는 비용(Cost)대비 효과(Benefit)에서 무려 34배의 가치를 창출해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성과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상급기관인 KIST나 과기처와 누차에 걸쳐 마찰을 빚으면서도 성기수가 SERI 소장직에 연임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성기수가 자신이 재직하는 25년 동안 SERI를 최고의 연구소로 키워갈 수 있었던 비결로는 조직관리 측면에서 철저하게 정글법칙을 적용했다는 점이다. 70∼80년대 SERI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최고가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도 정부는 연구원들에 대해 그만한 대우를 해주고 있었으며 이들의 연구개발 성과는 곧바로 우리나라 정보산업의 역사가 되던 시절이었다. 성기수도 관리자로서 이런 점을 가장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 연구원이 칭찬을 받게 되면 다른 연구원은 쓴잔을 마셔야 하는 사례들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SERI 소장은 아무나 앉는 자리가 아니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성기수는 SERI 소장으로서 자유방임형 관리자였다. 그러나 이 자유방임은 철저한 위임과 책임의 조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성기수는 연구원들이 올리는 결재서류에 대해 부정적인 결정을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떤 품의에 대해서도 일단은 긍정적인 시각을 가졌다. 일부 연구원들이 이를 역이용한 사례가 더러 있었지만 결국은 연구실적으로 그 결과가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품의 결과는 곧 해당 연구원 실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었다. 성기수는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 알면서도 모른 채 해두는 스타일이었다.

 SERI 출신 연구원들은 똑같은 내용에 대해 서로 다른 품의가 올라오더라도 성기수는 그 두개 모두를 결재해 줬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연구원들은 강한 자는 살게 하고 약한 자는 스스로 도태되도록 하고 마는 성기수의 독특한 스타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이런 성기수의 스타일을 놓고 조선 초 18년간 정승을 지낸 황희(黃喜)식 결재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황희 집에 어느날 남자하인과 여자하인이 서로 자신이 옳다고 다투고 있었는데 마침내는 시시비비를 가리려 황희를 찾았다. 남자하인이 먼저 『제가 옳지요』하니 황희는 『네 말이 옳구나』라고 답했다. 그러자 여자하인이 나서 『아닙니다. 제가 옳습니다』라고 하자, 황희는 다시 『그래 네 말도 옳구나』 하더라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부인이 『이것이면 이것이고 저것이면 저것이지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그런 엉터리 판결이 어딨습니까』라며 불평하였다. 그러자 황희는 부인을 향해 『그대 말도 옳도다』 하였다는 것이다.

 성기수의 황희 정승식 조직관리는 SERI 연구원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성기수가 재직하는 25년 동안 SERI에서는 80년 국보위 투서사건, 88년 올림픽전산화 후유증 등 신·고참 연구원들 사이에 몇번의 조직내 갈등이 있었지만 단 한번도 그것이 『소장 물러나라』로 확대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성기수가 SERI를 우리나라 정보산업 발전사의 중심에 서게 할 수 있었던 힘으로는 25년 동안 줄곧 과학자로서 논리적 사고와 투명성을 견지해 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SERI 연구원 출신 이명재(李明宰·부산대 경제학과 교수)는 과학자로서 철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의 사고방식은 일견 매우 단순하게 보이며 또한 후진들을 자상하게 가르치는 타입도 아니다. 종이와 석탄의 차이를 산 나무와 죽은 나무의 차이로 단순화시킬 수 있는가 하면 주위사람들의 의견에 대해 「응, 그렇지」 또는 「으응, 아니지」로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사물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미래를 확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기수가 소장으로 있는 동안 SERI 연구원으로 재직하다 현재 우리나라 정부기관·산업·연구소·대학 등에서 주요 보직을 맡고 있는 인물들은 약 7백여명. 주요 인사들로는 경상현·고건·구지회·권순덕·권영범·김길수·김길조·김길창·김동규·김봉일·김우영·김의홍·김진형·남석우·민병민·박동인·박병소·박성주·박승규·배일성·백인섭·변옥환·성승희·신동필·안문석·안영경·안태백·양영규·오길록·우치수·원유헌·유락균·유완영·윤재철·이경상·이광세·이기식·이단형·이만재·이명재·이무신·이옥화·이용태·이윤기·이은숙·이인동·이정희·이화순·전주식·정규동·정진욱·조영화·주혜경·천유식·최덕규·최정호·허문열·황규복 등이 있다. 이밖에도 70년대부터 주력한 교육사업 부문에서도 SERI는 4만3천여명의 고급 정보기술 인력을 배출해 냈다.

92년 1월 9일 성기수는 25년 동안 모든 것을 바쳤던 SERI에서 이임사 한마디 못한 채 소장직에서 물러났다. 1주일 뒤 과기처는 그가 「일신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했다」고 발표했지만 사실 그의 사임은 그 즈음 93대전엑스포 전산화 프로젝트 수행을 놓고 과기처와 SERI 사이의 25년 동안 해묵은 감정싸움이 폭발한 것이 원인이 됐다. SERI 강당에서 있은 소장 이취임 행사에서 과기처는 신동필(申東弼·KAIST 교수) 신임 SERI 소장의 취임사는 허락했지만 전임 성기수 소장의 이임사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1년후인 93년 12월 11일 대전의 한 호텔에서는 전현직 SERI 연구원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기수 박사 회갑기념사업준비위원회가 주최한 「의구(義矩) 성기수 박사 회갑기념집」 증정식이 열렸다. 이 행사는 1년 전에 듣지 못한 성기수의 이임사를 듣기 위해 후배들이 정성껏 마련한 자리였다. 이날 성기수는 후배 연구원들 앞에서 처음으로 뜨거운, 그러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눈물 몇 방울로 때늦은 이임사를 대신했다.

<60~80년대 SERI 연보>

◇66년 2월 구KIST출범

◇67년 6월 구KIST전산실 발족, 초대 실장에 성기수 박사

◇69년 9월 컴퓨터1호기 CDC3300 도입

◇70년 6월 국내 최초의 데이터통신 개통(KIST-경제기획원)

◇70년 11월 한글 라인프린터 개발

◇71년 10월 대입예비고사 채점 전산처리,전화요금업무 전산처리

◇73년 8월 전자계산부로 조직 확장

◇76년 6월 전산개발센터로 조직 확장

◇77월 2월 시분할교환기(EPBX) 개발

◇77년 9월 한글터미널 개발

◇79년 1월 IBM3032 도입

◇79년 12월 행정전산화 시범사업 완료

◇80년 10월 의료보험 전산화 완료

◇82년 1월 KAIST 부설 전산개발센터로 개편, 초대 소장에 성기수 박사

취임

◇83년 10월 제64회 인천체전 전산화

◇84년 4월 제1회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 개최

◇84년 11월 IBM과 소프트웨어공학센터(SEC)협력사업 개시, KAIST부설 시스템공학센터(SERI)로 개편

◇85년 11월 동사무소 전산처리시스템 개발

◇86년 9월 아시안게임 전산화

◇88년 10월 88서울올림픽 전산화

◇88년 12월 슈퍼컴퓨터 1호기 크레이 2S 도입 가동

◇90년 5월 대덕단지로 이전

◇90년 12월 시스템공학연구소로 개칭

◇91년 6월 과학기술유통정보시범서비스 개시

<후기>

 성기수 박사는 SERI 소장에서 물러난 후 잠시 SERI 연구위원을 거쳐 93년 5월 당시 KIST 소장이던 김은영(金殷泳)의 부탁으로 부설 연구개발정보센터(KORDIC) 초대소장을 맡기도 했다. 이어 95년 9월 부산 동명정보대학교 초대총장으로 선임돼 신생 동명정보대를 96년 설립 원년에 전국의 40대 우수대학으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본 시리즈가 시작될 즈음인 98년 2월 성기수 박사는 동명정보대 총장을 사임하고 현재는 ETRI 초빙연구원과 엘렉스컴퓨터 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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