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통신시설을 일본을 통해 개선하고 군사목적상 필요한 통신기관은 마음대로 설치해도 좋다는 조선정부의 제안은 실상 일본에게 우리 통신기관의 운영을 전적으로 넘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것마저 거절하고 오직 완전 탈취만을 고집하였다. 통신전쟁에서, 앞으로도 영원히 일어설 수 없도록 우리의 통신을 초토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일본공사는 마침내 우리의 의정부 회의에 직접 참석, 각 대신을 위협하여 찬성할 것을 강요하였고, 참정대신 및 외무대신으로 하여금 조속히 국왕의 재가를 얻도록 독촉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재정에 여유가 생기면 통신기관을 다시 반환해 줄 수 있다는 기만적인 조항을 초안에 추가, 끝까지 그 목적을 관철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국왕의 태도는 전날과 변함이 없이 단호했다. 우리의 통신기관을 우리가 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일본공사는 다음날 다시 의정부 회의를 열어 협정에 동의케 하고, 그 결의로써 국왕으로 하여금 반대할 여지가 없게 하는 술책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일본공사가 계획한 대로 쉽게 결론은 내려지지는 않았다. 그동안 정부 요로의 반대와 일본측에서 가장 두려워 하던 우리 국민의 항거가 크게 고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비밀리에 진행되어온 통신권 피탈을 위한 협정체결 내용이 의정부 회의에 안건으로 상정되면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국왕이 끝까지 협정체결에 불응하였음은 물론, 참정대신 조병식은 의정부 회의의 소집을 거부하여 안건이 토의될 기회를 막았다. 조병식은 처음에는 신병을 핑계로 불참하다가 뒤에 사직을 함으로써 굳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또한 주무장관이던 통신원 총판 민상호도 이를 끝내 수락하지 않았다. 민상호는 이미 1904년 2월중순에 우리 통신기관에 대한 일본의 부당한 침략이 가중되자 이에 항거하여 총판직을 사직한 바 있었는데, 이때에도 주무장관으로서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국왕과 참정대신, 통신원 총판 등 정부 요로의 과감한 저항에 발맞추어 일반 국민의 저항도 거세었다. 그 열기는 1904년 6월에 있었던 황무지 개간권 교섭 당시에 있었던 저항 못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의 반대운동도 끝내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차의 흐름이 자주 멈춰지고 있었다.
김지호 실장은 당시 상황을 생각하며 그때의 통신인들을 떠올렸다. 도입 초창기 통신인들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통신기술은 물론, 영어까지도 능통한 자만이 통신을 운용할 수 있었다. 통신전쟁에 이어 나라가 초토화해 가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그들의 안타까움이 현재 상황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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