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통신협정(韓日通信協定).
일본이 조선의 통신을 대신 운용하고, 거기에 관련된 시설과 토지를 무상 이용하며, 필요한 장비는 면세처리한다는 내용의 협정서. 우리의 주권을 빼앗긴 을사보호조약 체결 6개월 전에 맺어진 실질적인 주권피탈협정.
한일통신협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통신권이 일본에 넘겨진 시점은 1905년 4월 1일이었다. 이 협정체결로 우리나라의 실질적인 주권은 상실된 것이었다. 전국의 통신망을 일본이 관리할 때 나라의 신경이 끊기는 것이고, 신경이 두절된 몸체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협정은 그렇게 단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협정이 체결되기 전 이에 항거하기 위해 통신원 총판 민상호를 비롯한 직원들 대부분이 사직서를 제출하며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펼쳤다. 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전국의 유생대표들이 통신권 침탈에 대한 항의를 하였지만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집요한 야심을 당시로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차가 많이 밀리기 시작했다.
공덕동 로터리를 지나면서부터였다.
김지호 실장은 길게 이어진 차의 행열에 끼어 잠깐잠깐씩 우리의 통신권을 빼앗기던 당시의 생각들을 떠올렸다.
1905년 봄에 접어들면서 전세가 더욱 호전되고 조선에 대한 억압정책이 점점 효과를 보게 되자, 일본은 본격적인 통신사업권 강탈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1905년 2월 22일. 일본공사는 이미 제반 준비를 갖추고 조선 정부에 통신기관의 위탁을 요구하기 위해 직접 고종황제를 알현한 후 미리 준비해 두었던 협약 초안을 제시하였다.
국왕은 한국 통신기관의 존속을 희망함으로써 그 협정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본공사는 2월 28일, 약간 수정된 초안을 다시 제시하였다. 물론 통신권 강탈이란 본질에는 변함이 없는 내용이었다.
국왕을 비롯한 대신들도 협약 초안에 대하여 줄곧 반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끝내 이를 강요, 3월 21일에 드디어 그 초안을 의정부회의에 상정시켜 가부를 토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제시된 초안은 2월말에 수정된 것으로 4월 1일에 정식 체결된 협정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대신들은 반대할 뜻을 표명하고, 그 대안으로 우리의 통신기관은 그대로 두돼, 앞으로 일본을 통한 개선을 도모하는 한편, 일본이 군사상 목적에서 필요로 하는 통신기관은 마음대로 설치하라고 통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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