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지난 시각.
달 없는 하늘은 어두웠다.
굴곡진 2차선 도로를 승용차 한 대가 빠르지 않은 속도로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방금 전 어제 일어났던 광화문 네거리 맨홀 사고에 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던 마감뉴스가 끝난 라디오에서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턱에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남자. 이마가 유난히 길고 광대뼈가 불거져 나온 40대 중반의 남자가 밤길을 혼자서 운전하며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옆자리에 놓여 있는 가방에 다시 한번 손을 넣어보았다.
돈.
묵직한 돈뭉치 속에 넣은 남자의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남자의 가정이 있는 중국 연길에서 큰집 1백채를 사고도 남을 만한 큰돈이었다. 돈을 바꿀 필요도 없었다.
중국 연길에서는 한국 돈이 그대로 통용되기 때문이었다.
큰 가방을 하나 가득 채운 만원권. 남자는 헤드라이트에 흔들거리는 도로를 주시하며 한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한손으로는 계속 돈뭉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지나치는 차량은 많지 않았지만 속력을 낼 만한 도로는 아니었다. 우측으로는 바다. 비록 큰 낭떠러지는 아니지만 검은 빛으로 파도소리를 출렁이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남자는 가방 안의 돈뭉치를 계속 만지작거리면서 오늘 하루의 긴장된 순간들을 떠올렸다. 오늘 하루 방문한 은행이 1백 군데가 넘었다. 그 은행들을 일일이 방문하여 돈을 현금으로 인출한 것이었다. 두려움과 긴장의 연속. 어쨌든 잘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태안 반도까지 가서 이미 준비된 배를 타고 서해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남자는 인천에서 헤어진 안경 낀 사내를 떠올렸다.
이름은 모른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다만 서로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 사내에게 자신이 얼마나 필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큼 위험한 일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1백 군데도 넘는 은행에 통장을 개설하고, 단 하루동안 각각의 통장에서 현금을 인출한 것이었다. 액수도 똑같았다. 통장 주인의 이름도 똑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남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자신의 팔자를 고칠 수 있는 돈을 지금 자신의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둠 속에서 도로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으로 살았다가 죽고, 죽었다가는 다시 살아나며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숨가쁘게 지나간 하루. 사내는 다시 한번 돈뭉치를 힘주어 만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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