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152)

진기흥 옹은 다시 한번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들었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김지호 실장.

잘 받아 보았을까.

진기흥 옹은 오늘 오전에 보내준 자료를 김지호 실장이 잘 받아 보았는지 궁금했다. 요람일기를 정리한 내용을 PC통신을 통한 전자메일로 보냈던 것이고, 그 메일을 받은 후 연락을 주기로 했었다. 하지만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연락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역사(歷史).

진기흥 옹은 일생동안 매달려온 우리나라 통신역사 연구에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시점에서 그 어떤 신문물보다 앞서 도입된 전기통신. 특성상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 광범위하고 구체적인 영향을 끼치는 통신매체의 역사는 곧 그 사회의 역사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산업화를 앞에서 이끌었고, 지금도 사회 기반구조로서 다른 분야와는 다르게 부족함 없이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 바로 통신이라고 할 때, 그 역사를 누군가가 관리해 주어야 하는 것이었고, 진기홍 옹은 기꺼이 그 일을 맡았던 것이다.

김지호 실장도 통신 역사에 대한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역사를 알지 못하고 앞으로의 일을 예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진기홍 옹과 김지호 실장은 그런 면에서 의기가 투합되었다. 진기홍 옹과는 달리 현직에 있는 통신 운용자이지만, 지난 통신 역사는 현재의 통신사업은 물론, 앞으로 새로운 통신사업을 추진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사항들을 미리 예측하고 그 영향을 파악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진기홍 옹은 요람일기를 발견하고 나서 김지호 실장에게 연락을 했을 때 그가 얼마나 놀라워했고, 기뻐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요람일기의 내용이 보고 싶다며 즉각 달려온 그였다.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지만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재정리되기를 고대하던 김지호 실장에게 오늘 오전 자료를 보내준 것이었다.

진기홍 옹은 요람일기가 쓰여질 당시의 정세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햇다.

힘.

결국은 힘이었다.

힘이 없는 정부는 통신을 지킬 힘이 없는 것이었고, 통신을 빼앗겨버린 나라는 그 나라의 주권도 함께 빼앗겨버린다는 이치를 요람일기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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