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86)

해가 저물고 있었다.

서쪽으로 한참 기운 해가 소방관들이 뿌려 대고 있는 물에 무지개를 드리우고 있었다. 불과 무지개. 연기. 그리고 소리.

결코 어둠이 몰려들지 못하게 할 것처럼 거세게 불꽃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둠을 몰아내는 기수처럼 당당한 불, 그러나 그 불꽃이 삭으러 든 뒤에는 더 큰 어둠과 악의 잔해를 남기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불의 이율배반적 속성이었다.

환철과의 섹스도 그랬다.

불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이다. 활활 타오르며 위로만 솟구치는 불길은 하향성을 배제하는 속성을 지녔다. 불은 결코 추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섹스의 속성과도 닮아 있었다. 혜경에게는 그랬다.

혜경은 다시 자신의 방에 걸려 있는 그림을 떠올렸다. 거꾸로 매달린 채 고통과 쾌락의 눈빛을 동시에 뿜어 대고 있는 프로메테우스.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하여 쇠사슬에 묶여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투쟁을 노래했다. 혜경은 그림을 볼 때마다 환철은 프로메테우스적 비극을 맞게 되더라도 철두철미한 시나리오를 통해 스스로 결박을 풀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만큼 치밀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치밀성은 혜경의 온몸을 다스리는 데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불꽃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맨홀에서 솟아오르는 불기둥을 바라보면서 몰려든 수많은 구경꾼들은 환상을 보고 있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꽃의 조형성과 보이기는 하지만 잡히지 않은 비질료(比質料)성이 보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탄력성을 부추기고 있었다. 형식과 형태를 갖추지 않은 정신으로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안타까움과 기대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불.

혜경은 도로 한가운데서 솟아오르는 여러 개의 불기둥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승민을 생각했다.

승민의 가족이 올라와 있을 텐데.

혜경은 시계를 보았다.

16:55.

이제 은행 일도 어느 정도 끝나야 할 시간이 었지만 화재로 인한 온라인이 끊어진 지금, 은행 안으로 들어서도 별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도시 대부분의 전화가 불통이되어 승민과의 연락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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