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7)

최광수장관의 부임으로 본격화하던 공사 설립작업은 오명차관의 부임으로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준비기간이 워낙 짧아 빠듯한 일정에 쫓겨야 했다. 공사 설립작업에 있어서는 몇가지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제들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미 기술한 바 있는, 인원을 어떻게 분리하느냐는 문제 외에도 재산 을 어떻게 분리해야 하느냐는 문제도 있었고, 그에 앞서 공사의 조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며 동시에 남게 될 체신부의 조직이 과연 정부 부처로서 존립 할 수 있느냐는 심각한 문제도 제기되었다.

또한 공사의 기본 규범인 정관이나 사규를 제정하고, 인사제도를 마련하는것도 골치아픈 일이었고, 그밖에도 기능직이나 고용원직인 체신부 직원을 공사의 정식 사원으로 임명하는 문제나 공무원 신분을 벗어나게 되는 직원들에 게 일시에 퇴직금을 지급하는 문제도 골치아픈 문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국내외의 선례가 있고, 또 건전한 상식으로 판단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6개반 40명으로 구성된 공사설립 실무반의 작업과 타부서 직원들의 협조 로 예정된 기간에 마칠 수 있었다.

공사 설립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듦에 따라 81년 10월에는 공사업무인수 국이 설치되고, 인수국 책임자로 처음부터 공사행을 분명히 했던 보전국장 이희두가 임명되어 마무리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어서 11월16일에는 공사 사장으로 국회의원 이우재가 임명되었고, 사장 임명을 전후해 공사개설준 비위원이 지명됨으로써 공사 체제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국영기업체인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에는 어떤 사람이임명될까? 전.현직 체신부 간부일까, 원로급인 정계.재계 거물일까, 아니면신군부의 핵심세력일까? 7만명의 체신공무원들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그 자리에는 뜻밖에도 신군부 출신의 뉴페이스가 등장했다.

그러나 당시 시대상황을 유심히 지켜본 사람들에게 이우재는 결코 뉴페이스 가 아니었다. 육군 통신감실 차감 시절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그는 국보위가 발족하면서 교체분과위원장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국보위에서 전기통신사업의 공사화와 데이터통신 전담회사의 설립문제를 검토한 바 있던 그는국보위 입법회의 내무위원을 거쳐 81년 3월 11대 국회가 열리면서 전국구 의원으로 변신했다.

통신장교 출신인 이우재가 그처럼 갑자기 각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신군 부 핵심세력과의 오랜 인연 때문이었다. 육사 시절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그는 2년 선배인 전두환과 같은 축구부원으로 각별한 사이가 되었는데, 그러한 친분은 하나회로 이어져 보다 두터워졌다. 때문에 그는 전대통령이 찍어서내려보낸 것으로 소문나 있었으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제청권자인 최광수장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국영기업체 사장으로서 마땅한 재목을 발견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오명차관을 그 자리에 앉힐 생각도 했으나 차관이 된 지 반년밖에 안돼 경륜이 너무 짧았다. 또한 그는 체신부에 서도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공사의 사장은 반드시 기술자여야 할 필요 는 없다고 생각했다. 큰 조직을 끌고나갈 수 있는 지도력과 행정능력이 필요 하고 외부 압력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국보위 교체분과위원장으로서 공사화 문제를 검토한 바 있고, 다시 국회의원 으로서 한국전기통신공사법 입법과정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던 이우재의 원도 대상으로 떠올랐으나, 그는 그 당시 국회 교체위원회의 민정당간사로 활약하고 있어 대상에서 제외했다.

백지 상태에서 최장관은 전대통령을 만났다. 전대통령도 특별히 염두에 두고있는 사람은 없는 듯이 말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한사람 한사람 따져 나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국영기업체이므로 박태준 포철 사장처럼 모든 정력을 쏟아부어 일류회사로 만들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했다. 그런데 이우재가 대상에 오르자 둘 사이에는 이견이 없었다.

"인사라는 게 대통령이 장관에게 처음부터 아무개 하라는 법은 없는 겁니다.

아무리대통령이라도 처음부터 그렇게는 못합니다. 서로 상의를 해보는거죠.

장관이제청한 사람이 마음에 안들 경우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지 않느냐하면그것으로 끝나는 거고, 또 대통령이 아무개가 좋지 않느냐 할 때 장관입장에 서 그것은 좀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면 안되는거죠." "이우재씨에 관한 한 대통령과 내 의견이 똑같았아요. 국회의원을 그만둔다면 제일 적임자였어요. 군에서 오랫동안 통신을 다룬 통신장교 출신인데다 국회 교체위원회 민정당 간사로 있으면서 공사법 입법과정에서부터 관여해서 내용도 잘 알고 있고 또 인품도 훌륭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무리가 없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결정했어요." 최장관의 주장이었다.

사장 임명을 십여일 앞두고 이우재 의원은 청와대로 불려갔다. 전대통령은 대뜸 공사의 조직표를 펼쳐보이며 사장자리를 맡으라고 했다.

"감사합니다만 제 분에 넘칩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자리를 맡겠습니까.

제가 생각할 때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자리는 전에 체신부장관을 역임하셨거나 덕망이 있는 분을 앉히는 게 순리인 것 같습니다.""그럼 누구를 추천하겠소? 이우재는 체신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바 있는 모인의 이름을 들추었으나 전대통령은 "아무 소리 말고 당신이 맡아."하는 말로 결론을 내렸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통신공사 사장이 군 통신감을 겸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부터 전대통령은 이미 이우재를 공사 사장으로 점찍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이우재의원이 전혀 뜻밖에도 사장에 임명되었다.

그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지, 얼마나 좋은 자리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신설 공사의 사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그는 국회의원이라는 새로운 자리가 그것도 교체위원회 민정당 간사라는 자리까지 주어졌기 때문에 국회의 원으로서의 4년을 충실히 보내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11대 국회에서 통신공사 설립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어요.

그게잘되겠느냐는 등 주로 걱정하는 얘기였죠. 지내 놓고 보니까 내가 거기 들어가려고 질문을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청와대에 불려가서는 나도 깜짝 놀랐으니까요. 그리고 공사 사장으로 갈 때는 기구가 너무 커서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들어갔지, 좋은 자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사장이 임명됨으로써 공사 설립작업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해 12월 4일 정부에서 제1회 자본금으로 현금 5억원을 납입하였고, 12월 10일에는 이사와 감사를 임명하고 공사 설립등기를 완료했는데, 이날부터 한국전기통신 공사는 사실상 탄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 탄생한 공사가 업무를 개시한 것은 82년 1월1일부터였다.

82년 1월1일 공중전기통신사업 수행을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전기통신공사는자본금 2조5천억원, 사원 3만6천73명, 전화국.전신국.전신전화국 등으로 구성된 관서수 1백53개로 우리나라 국영기업체 중 최대 규모로 출발했다. 그리고 당시의 국영기업체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일반의 예측과는 달리 순풍에 돛을 단 채 유유히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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